일주일이 지난 우리 연극팀.
지난주 함께 모여 감자탕 집에서 시파티를 했었다. 한 명 빼고 모든 사람이 모였었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연습하기 위해 모인 연습실에 일찍 도착한 나는 한 사람씩 도착한 분들께 인사를 했다. 여기까진 성공적이었다. 일찍 도착했고, 인사도 반갑게 전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의 인사를 받아준 상대는 더욱 큰 몸짓과 밝은 표정으로 내 이름까지 불러주며 감사의 인사를 더했다.
"안녕하세요. 승환 님. 잘 지내셨나요?
"네, 잘 지냈어요. 날씨가 좋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슬슬 더워지는 거 같아요. 괜찮으시면 에어컨 켤까요?"
"좋죠. 저도 방금 와서 약간 더운가 싶었는데, 잘 됐네요."
이게 진짜 큰일이다. 나는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불러드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난 까먹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름을 잘 못 외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외우고자 했다면 가능했을 텐데, 정말 후회가 됐다. 분명 시파티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뇌'는 집에 두고 갔었는지 반가운 이들의 이름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릴 듯 한 상황에서 일단 한숨 돌릴 수 있었던 게, 곧이어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우리의 대화는 그쳤지만 다른 이들의 대화에 쉽게 끼어들 수 없다.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민망했다.
하늘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는데, 왜 아무것도 안 했던 나를 돕는진 모르겠지만 절호의 기회가 왔다. 대화를 잘 듣고 있으니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다들 기억력이 좋은가 보다. 아무튼 대회를 듣고 있으면 이름이 저절로 외워지는 효과가 있었다. 대화에서도 못 외울 수 있으니 살짝 커닝을 해서 핸드폰 메모장에 몰래 이름을 적어 두었다. 다시는 까먹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며 몰래 거둬드린 이름을 숨겨두었다.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우리 연기를 지도할 연출이 도착했다. 연출가 선생님은 이미 모두를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나도 연출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니 다른 배우들도 그러했으리라 짐작했다. 코스트코에서 산 검은색 테이블이 우리 가운데 놓여 있다. 연출이 들어오고 나선 주변이 정리되어 조용한 분위기에 서로 얼굴만 보고 앉아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연출이 가방에서 종이 한 뭉치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 두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가 올려둔 건 대본이다. 대본이라는 건 흔히 접할 수 없는 문학 중 하나이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언어영역 지문으로 희극을 많이 읽어본 적 없고, 도서관에서 따로 희극을 읽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낯선 책이다. 책처럼 생겨서 책이라고 부르지만 많은 양의 인쇄물이라 불러도 될 것 같다. 대본이라는 모습을 가진 두꺼운 복사용지엔 제목만 적혀 있었다.
책을 받아 들자 내가 연극을 한다는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시파티에서 다들 각자 경력이나 경험에 대해 이야길 하면서도 공연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 조금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대본을 받아 들고 나니 진짜 공연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뭔가 알 수 없는 찌릿함이 있었다. 이런 게 도파민일까? 나도 모르게 서둘러 한 장을 넘겨 대사가 나오는 부분으로 넘겼다. 배경소개와 인물 소개, 몇 가지 소품들에 대한 묘사가 담겨 있었다. 대본을 읽다 보니 마치 내가 관객이 되어 객석에 앉아 바라보는 무대의 모습까지 묘사되어 있어서 읽어나가다 보니 무대가 그려졌다. 다들 소리 없이 종이 넘기는 '스르륵' 소리와 침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잠시 후 연출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다들 대본 한 번씩 보셨나요? 아는 내용의 대본 일 수도 있고, 처음 보는 내용일 수도 있는데, 다 같이 일어 보면 느낌이 다니까 같이 한번 읽어보죠. "
"네"
"그럼 배역정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순서대로 나오는 인물의 대사를 말해주시면 됩니다."
"네"
"감정은 들어가도 되고 안 들어가도 되는데 대사는 또박또박 말해주세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사이)
사람들의 소리가 한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내용이 눈앞에 그려질 듯하고, 대본 속 인물들의 성격이나 말씨가 나타나 보이기도 했다. 서로 번갈아 가면서 대사를 주고받았다. 역할 1이었다가 3이었다가 7이었다가 다시 3으로 갔다가... 맡은 배역이 없었고, 대본에 나오는 순서대로 인물의 대사를 읽었다. 사투리를 넣어 보기도 하고 인물이 했을 법한 손동작을 넣기도 했다. 연출이 중간마다 나오는 지문을 읽어주었고 장면이 묘사하는 장소와 관계를 설명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선 모두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모르긴 해도 이들도 나와 같이 작은 설렘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대본 하나가 다른 사람의 인생 일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기도 해서 더욱 공감이 되었다. 읽어 나가는 중엔 대사에 신경 쓴다고 정신이 없고 분주했지만 대본 속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작은 세상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대본 읽기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