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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Dec 16. 2023

프랑스에서 '20만 원'을 현명하게 쓰는 법

돈이냐 추억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자동차를 빌려 떠나는 유럽 소도시 여행. 모든 배낭여행자가 한 번쯤은 꿈꿔보는 로망이 아닐까 싶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 사이를 달리며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바람을 만지는 것. 나 역시 <레터스 투 줄리엣> 같은 영화를 보면서 그런 꿈을 꾸곤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나에게도 그런 멋진 여행의 기회가 찾아왔다!




익숙한 파리를 거닐다


별다른 목적지 없이 그냥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고 집을 나선다. 도어록이 없으니 혹시나 열쇠를 집안에 두고 나오지는 않았는지, 문은 잘 잠갔는지 재차 확인해야 한다. 쥐가 드나들기 딱 좋게 삭아버린 낡은 나무 문 밑의 틈은 발매트로 잘 막아둔다. 빙글빙글 돌아 계단을 내려오고, 두 손으로 끌어당겨도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지는 두꺼운 철문을 두 개 거치면 비로소 익숙한 파리의 골목이 나온다.



이제는 동네의 골목골목을 훤히 알아서, 굳이 지도를 보면서 걷지 않게 되었다. 퐁피두나 루브르까지는 이제 눈 감고도 오갈 수 있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걸어 나가면 지하철역과 광장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나가면 센강과 까르푸가 있다. 핸드폰은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자유롭게 두 손을 팔랑거리며 길을 나선다.


매일 12km 넘게 파리의 골목 곳곳을 거닐다 보니, 어느새 이 작고 화려한 도시가 내 집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에펠탑이나 라파예트 같은 명소를 봐도 큰 감흥이 없었다. 거리에 놓인 초록색 벤치에 가만히 앉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는 걸 더 선호하게 되었으니까. 내가 파리를 익숙하게 여기게 되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여행 속의 여행


이쯤 되니, 여행메이트인 M과 나는 고민에 빠졌다. 잠시라도 익숙한 파리를 떠나 '여행 속의 여행'을 즐기는 건 어떨까? 한국에서 유럽까지 비행기에만 200만 원을 들여, 14시간을 날아오지 않았는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EU의 특성상 국경을 넘는 게 자유로우니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실제로 파리에 사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굳이 휴가를 내지 않고도 주말 동안 잠시 다른 나라로 여행을 다녀오는 게 흔하다고 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독일, 벨기에, 스페인부터 해저 열차를 타고 금방 갈 수 있는 영국 런던까지. 선택지가 많으니까. 우리도 근처에 있는 나라를 더 둘러보는 게 좋지 않을까?


영국에 살며 이웃국가를 여행했던 M과 달리, 나는 벨기에도 네덜란드도 가본 적 없었다. 브뤼셀에 가서 와플을 먹고 오는 건 어떨까? 잘하면 암스테르담까지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한편으로는, '파리가 아닌 프랑스'에 닿고 싶기도 했다. 수도가 그 나라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몇 번의 논의 끝에, 짧게나마 프랑스의 소도시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20만 원'을 현명하게 쓰는 법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기차를 탈 것인가, 자동차를 빌릴 것인가. 프랑스는 열차가 아주 발달되어 있어 어느 지역이든 선택하기 편했지만, 기차를 타고 간다면 도시 내에서 또다시 대중교통을 타야 하니 여행 루트를 짜는 데 제약이 생길 것 같았다. 조금씩 자동차로 마음이 기울었다.


무엇보다도, M의 간절한 요청이 있었다. "한 번쯤은 자동차를 타고 한적한 프랑스의 도로를 달려보고 싶어." 기차로는 2시간도 안 걸릴 거리를 4-5시간씩 운전하며 이동한다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우리는 기꺼이 행복한 바보가 되기로 했다.


그렇게 프랑스 내의 운전 주의사항과 렌터카 업체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결정의 순간. 어떤 차를 빌릴 것인가. 마우스 커서가 무난한 중형차와 귀여운 오픈카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오픈카를 타고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 사이를  달리는 환상적인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20만 원 차이야. 어떻게 할래?"


20만 원이라. 20만 원은 우리에게 아주 큰돈이었다.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다 2주 내내 밥을 차려먹을 식비 정도는 됐다. 그 돈이라면 과일부터 샐러드, 신선한 오렌지 착즙 주스까지 아낌없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레스토랑에 가서 애피타이저와 와인 한 잔을 곁들인 식사를 한다면 두 끼면 다 써버릴 돈이기도 했다. 아, 20만 원. 이 20만 원을 어떻게 쓰는 게 좋을까?




어김없이 추억을 택하겠어요


선택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소도시 여행 계획을 통째로 엎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잠시 계획 세우기를 보류하고,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김치찌개에 넣을 양파를 써는데, 매운 기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대체 프랑스 양파는 왜 이렇게 매운 건지. 임시방편으로 냉동실 문을 열어 머리를 푹 집어넣고는 또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내가 왜 파리에 왔더라? 돈도 시간도 없는 주제에, 꾸역꾸역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온 이유는 뭐였나. 모든 건 추억을 쌓기 위해서였다. 내 청춘을 이 도시에 아주 선명하게 새겨놓기 위해서. 훌쩍거리며 냄비 안에 양파와 김치를 툭툭 털어 넣고는, 방에서 일을 하던 M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타자, 오픈카."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눈으로 비장하게 말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M이 씨익 웃었다.


우리는 2주 치의 풍족한 식량을 포기하고 겨우 자동차 뚜껑을 여는 데 20만 원을 몽땅 쓰기로 했다. 어쩌면 이 결정 때문에 여행을 다녀온 뒤 일주일 내내 빵만 먹어야 할 수도 있다. 지하철 티켓 살 돈이 부족해서 발이 팅팅 부을 때까지 걸어 다녀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어김없이 추억을 택하기로 했다. 손을 덜덜 떨며 오픈카를 예약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이때는 미처 몰랐다. 이 결정이 우리의 여행을 송두리째 바꿔놓으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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