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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Jan 06. 2024

프랑스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48살 차이가 나지만요!

이 글은 <프랑스 시골에서 5만 원짜리 숙소를 예약했더니!>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hyegyo/240





프랑스 시골마을의 지도를 쥐고


집주인 쟝 할아버지는 찬장에서 각종 견과류와 과자를 꺼내고, 맥주에 맛있는 시럽을 타서 칵테일도 만들어 주었다. 웰컴드링크 치고는 제법 거창했다. 예상보다 훨씬 맛있는 맥주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즐거운 듯 허허 웃었다. 집 사진을 멋지게 찍어주어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에겐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기보단 즐거운 여가인 듯했다. 은퇴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프랑스의 작은 마을까지 여행을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서로 묻고 답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는 영어를 잘 못했고, 우리는 프랑스어를 잘 못했지만 어떻게든 대화가 통했다.


쟝은 이내 지도를 펼쳐 마을 곳곳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유명한 곳이니 꼭 가 봐야 해. 엄청나게 아름답지." 종이 지도에 하나씩 동그라미를 그려준 그 덕분에, 오래간만에 스마트폰 속 구글맵을 접어두고 지도를 손에 쥐게 됐다. 즐거운 일이었다.




다리 앞에서 만나자


즐거운 대화를 마치고, 우리는 마을을 조금 더 둘러보러 나가기로 했다. "할아버지만 괜찮으시면, 오늘 저녁을 먹은 뒤에 맥주 한 잔 더 해요! 우리가 맥주를 사 올 수 있어요."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답했다. "너희가 저녁을 다 먹은 뒤에는 문이 열려있는 상점이 없을걸."


파리에 머물 때부터 느낀 거지만, 확실히 프랑스 상점들은 일찍 문을 닫는 편이었다. "그래도 아직 저녁 7시인데, 열려있는 마트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저녁 먹기 전에 사두면 될 것 같은데." M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차에, 마치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라도 한 듯 쟝이 이야기했다. "지금쯤이면 다들 이미 퇴근하고 저녁 먹으러 갔을 거야." 집에서 간단하게 맥주 한 잔을 하려던 계획은 그렇게 틀어졌다.


"대신 내 단골 맥주집에 데려가 줄 테니 저녁 먹고 이 다리 앞으로 오렴." 쟝이 지도에 별표를 치며 만날 곳을 정해주었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그의 약속 방식이 정겹게 느껴졌다. 우리는 8시 반에 만나기로 하고, 혹시 모르니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전화하겠다고 이야기하며 집을 나섰다.




프랑스인의 칼퇴 본능


마을 사람들이 모두 저녁을 먹으러 갔을 거라던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서점, 옷가게, 마트를 비롯한 모든 상점의 문이 닫혀있었다. 불을 밝히고 있는 건 오직 저녁 손님을 받기 위해 열려있는 레스토랑들과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는 단 한 곳의 기념품 가게였다. 저녁 7시의 거리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아주 고요했다.



파리에 머물며 느낀 거지만, 프랑스인들의 칼퇴 본능은 정말 대단하다. 아니, 어쩌면 그들에게는 '칼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시간에 퇴근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중에서도 특히나, 과로의 나라 한국에서 온 우리에게 유난히 낯설게만 느껴졌던 것은 바로 가게에 적혀있는 영업시간이 곧 그들의 노동시간이라는 거였다.


한국의 경우, 영업시간이 10시부터라고 적혀있다면 10시에 바로 매장에 입장할 수 있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보통 주인이 더 일찍부터 나와 영업을 준비한 다음 10시에 맞춰 문을 여니까. 그러나 프랑스에서 영업시간이 10시부터라는 건, 대체로 가게 주인이 10시에 출근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영업 종료 시간도 마찬가지다. 오후 6시까지라고 적어두고는 5시 45분쯤부터 셔터를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6시에 퇴근해야 하니까. 처음에는 이 사실을 모르고 영업 시작 시간에 맞춰 움직여 몇 번이나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




프랑스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는 법


문을 연 레스토랑을 찾아 저녁을 해결하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쟝 할아버지와 만나기로 한 다리 앞으로! 멀리서 얇은 외투를 걸쳐 입은 그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내가 다니는 맥주집은 골목 구석에 있어서 너희가 찾긴 힘들 거야." 키 큰 할아버지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다 보니, 어느덧 멋진 분위기의 펍이 나왔다.


사장님이 다가오자 쟝은 프랑스어로 우리를 소개했다. 반갑게 악수를 청하는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테라스에 앉았다. 무엇이든 잘 먹는다는 내 말에, 쟝은 자신이 늘 마시던 맥주를 주문해 주었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 집을 숙소로 내놓은 것은 경제적인 이유보다, 은퇴 후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함이었다는 걸. 좋은 위치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저렴했던 숙박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손짓 발짓을 총동원하며 대화를 나눴다. 프랑스를 여행하며 글을 쓰고 있다는 나의 말에, 쟝은 눈에 띄게 기뻐하며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내 손녀뻘인데 벌써 작가가 됐다니!"라는 칭찬도 빼놓지 않았다. "프랑스 가수를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카를라 브루니를 좋아해요."라는 말에는, "한국에서도 유명하다는 건 몰랐군! 그런데 난 그 사람 노래를 들으면 항상 잠이 와."라고 응수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기념품


"그 유명한 오줌싸개 동상이 여기 콜마르에도 있어, 알고 있니?" 내가 고개를 젓자, 쟝이 맥주잔에 그려진 그림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크기는 작지만, 벨기에에 있는 것보다 멋지지. 그래서 이 잔에도 그 동상이 그려져 있는 거야." M과 나는 신기한 마음에 잔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두었다.



그때, 쟝이 사장님을 불러 프랑스어로 무어라 이야기했다. 복잡한 프랑스어를 알아들을 자신이 없었던 우리는 그저 맥주를 홀짝이며 기다렸다. 사장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쟝이 서툰 영어로 말했다. "저 친구한테 이야기해 뒀으니 지금 그 잔을 집에 가져가렴. 내가 주는 기념품이야." 상상도 못 했던 선물에 놀란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 고마워요!" 쟝은 별 것 아니라는 듯 허허 웃었다.


게다가 그는 우리의 맥주값까지 내주었다. "숙박비가 5만 원인데, 우리한테 맥주 사주신 돈을 빼면 얼마 남지도 않겠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며 M과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48살 많은 우리의 새 친구는 쿨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이제 집에 가서 같이 TV 보자고!"




그의 집을 떠나던 날, 그는 집 앞의 골목까지 우리를 배웅해 주며 말했다. "언젠가 크리스마스에 다시 보게 되면 좋겠구나. 콜마르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특히 아름답거든."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꼭 그러겠노라 말했다.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소도시인 이곳에 다시 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기로 마음먹었다. 우리의 친구 쟝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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