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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Jan 13. 2024

전재산을 털어, 파리에서 한 달을 살아봤더니

축제 같은 나날이 고스란히 남았다


'파리 한 달 살기'를 경험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게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에 불과했다. 뉴욕, 런던, 로마 그리고 파리. 볼 것도 많고 살 것도 많은, 해외여행을 계획하다 보면 꼭 한 번쯤 루트에 넣게 되는 그런 도시. 딱 그 정도의 의미.


무언가에 쫓기듯, 모두가 좋다 말하는 곳들만 따라다녔기 때문이었을까? 파리를 두 번이나 여행하고 난 뒤에도 내 생각에는 큰 변함이 없었다. 낭만적인 도시, 사랑스러운 도시. 눈길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도시. 그런 뻔한 수식어를 몇 개 더 붙일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세 번째로 이 도시에 돌아왔을 때, 파리는 내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들을 안겨주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파리까지 가서 박물관과 미술관에 들르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예술의 도시, 파리를 제대로 여행하려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니까. 과거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술에 그리 큰 흥미도 없으면서, '파리에 왔으면 이건 봐야 한다던데!'라는 뻔하고 고리타분한 생각 하나로 반나절을 꼬박 들여 루브르와 오르세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파리에 머무는 한 달 동안 미술관과 박물관에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정말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꼬박 한 달을 들여 나만의 파리 여행 필수 코스를 새롭게 구성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도서관이었다. 특히 아름다운 공간에서 책을 읽는 걸 사랑하는 사람에게 파리만큼 완벽한 도시는 없다. 오늘은 어떤 도서관에 가볼까, 그런 기대감 때문에 아침에 눈이 번쩍 떠질 정도였다.



도서관에 앉아 얌전히 책을 읽다가도 가끔은 끓어오르는 질투를 삼키기 힘들었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책을 읽는 게 파리지앵들에게는 당연한 일상이라니! 파리에 머무는 짧은 기간만큼이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책을 읽는 사치를 마음껏 누리기로 결심했다. 나도 이런 일상을 한 조각쯤 지닌 채 살고 싶었다.


내가 갔던 도서관은 대부분 회원카드만 있다면 누구나 열람실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학생들 사이에 섞여 회원카드를 발급받는 나를 보며, 친절한 도서관 직원이 내게 말해주었다. "카드를 잃어버리면 재발급하는데 10유로가 드니까, 꼭 잘 챙기셔야 해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파리에 또 오게 된다면 꼭 카드를 챙겨 와야지. 내가 언제 돌아오더라도 이 도서관은 변함없이 이 자리에 있을 테니까. 늘 그래왔듯이. 그런 생각을 하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스마트폰 없는 세상에 떨어진 것처럼


햇살이 따스한 오후, 파리의 공원에 가면 마치 2005년쯤의 어느 날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찾기 힘들고,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책을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 명이 잔디밭에 누워있는데, 단 한 명도 스마트폰을 꺼내 든 사람이 없다니. 마치 스마트폰 없는 세상에 떨어진 것만 같은 이 풍경이 너무 낯설었다. 


오죽 신기했으면, 구글에 '프랑스인 독서량'을 검색해 보기에 이르렀다.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인들의 월평균 독서량은 거의 여섯 권에 달한다고 했다. 한국 성인의 월평균 독서량이 한 권도 채 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 보면 경이로울 정도의 수치다. 나는 여행메이트인 M에게 이 사실을 일러주며, "프랑스어에서 작가로 활동하면 책을 좀 더 많이 팔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실없는 농담을 던지곤 했다. 어쨌거나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모두가 책을 손에 쥐고 있는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파리


파리에 머무는 내내 가장 자주 찾았던 교통수단은 버스도 지하철도 아닌 자전거다. 좁은 골목이 가득하고 차도 사람도 많은 파리에서 자전거만큼 효율적인 이동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자전거를 사랑하기로 유명한데, 실제로도 출퇴근시간이 되면 끝없는 자전거 군단이 도로를 가득 채운다.



나 역시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공유자전거 이용권을 끊었다. 한 달의 기한 내에 5시간 동안 마음껏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 티켓이었다. 파리는 그리 넓지 않아서 센강을 따라 달리다 보면 웬만한 곳은 20분 이내로 도착할 수 있다. 덕분에 한 달간 이 이용권을 야무지게 활용할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몽마르뜨 언덕에서 친구를 만나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비현실적일 정도로 조용한 밤의 파리를 달리던 순간.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는 밤공기와 달빛에 어우러진 가로등 불빛까지, 모든 게 완벽한 순간이었다.




만약 파리에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파리에 관하여 헤밍웨이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젊은 시절 한 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것이다.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파리는 날마다, 움직이는 축제. 그 모호하고 아름다운 말을 이제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전재산을 털어 얻어낸 것이니 꽤 비싼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초록색 벤치에 앉아 산책하는 개들을 구경하던 동네의 작은 산책로를, 햇빛을 만끽하며 누워 책을 읽던 공원의 잔디밭을, 갓 구운 바게트를 뜯어먹으며 잠시 걸터앉았던 성당 앞 돌계단을 돌이켜보며 그 말을 떠올리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시는 파리에서의 삶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어쩌면 파리를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말은 낭만과 사랑 같은 명사 아닌, '고스란히'라는 부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또 수많은 청춘의 한 페이지가 고스란히 남게 될 곳. 시간이 흐르며 모든 기억이 무뎌지기 마련이지만, 어떤 경험과 감정은 작은 파편처럼 삶에 박혀 반짝인다.


만약 파리에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축제 같은 순간들을 나는 영원히 간직한 채 살아가기로 했다러니 내가 파리를 기억하듯이, 파리도 나를 기억하기를. 언젠가 다시 찾아갔을 때, 어느 가을날 내가 이 도시에 새겨둔 파편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나를 반겨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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