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결정적 계기는 당사자 내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우울의 결정적 계기는 당사자 내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우울증의 원인을 10년 넘게 탐구한 저널리스트이자 우울증 유병자인 요한 하리가 내린 결론입니다. 요즘 문제로 대두하는 청년 세대 우울 및 늘어나는 20대 자살시도율을 예시로 보겠습니다. 취준생이 우울증으로 힘들지만, 취업 실패의 원인은 취준생 개개인이 아니라 포스트 코로나 시대 불황으로 대변되는 외부 환경에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2020년 하반기 현재 취준생 우울증만큼 요한 하리의 설명이 적합하게 맞아 들어가는 상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뒤돌아 보면 제가 영국에서 취업에 도전했던 약 1년의 시간 또한 상경계 국제학생이 현지 회사 취업을 하기에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브렉시트로 인해 발생하는 인력 시장의 불확실성으로, 영국에서 일할 수 있는 비자를 합법적으로 보유하지 않은 학생들을 받지 않는 곳이 크게 늘어난 겁니다. (당시 영국 경영대생 최대 채용 주주인 PwC 마저도 국제학생 지원을 보류하겠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전통적인 뇌과학 분야에서 우울증은 뇌의 호르몬 불균형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세로토닌 및 도파민 수치를 정상치로 회복할 약물을 처방하는 것이 정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하리는 극단적인 심리적 고통을 겪는 환자들을 인터뷰하며 이들이 처한 외부적 환경과 사건들이 우울을 유발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취업이 평소보다 배로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 도전한다면 거절당하고 좌절을 경험하는 일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취업 실패로 인한 우울은 호르몬의 부족에서 생겨난 현상이 아니라 거듭되는 절망에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심리적 대항마라는 것입니다.
네이버 웹툰 "노력의 결과"에서 재경이는 반드시 시험에서 백 점을 받아야만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엾은 주인공입니다. 고등학교 진학 후 처음으로 100점을 받지 못하면서 아버지의 폭력과 정신적 학대를 견뎌내게 되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충분히 공부하지 않아서라는 잘못된 진단을 내리고 스트레스에 성적이 더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죠. 나중에는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보이면서 절망적인 상태로 접어듭니다.
N수 생 또는 고시생의 생존기를 유튜브나 블로그로 들여다보며 공감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초반에는 발전하던 모습을 보이다가 어느 시점부터 계속 성적은 떨어지고, 어둠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듯한 절망적인 심경을 경험하는 겁니다. 이는 영국에서 저의 취업 낙방 시절 느낀 감정과도 닮아 있습니다. 낙방 200번, 아니 300번까지는 용기를 가지고 다시 도전할 수 있었고 자소서도 조금씩 꾸준히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어느 순간부터 저는 불합격할 서류를 마구잡이로 보내며 나는 어떤 영국 회사에서도 원치 않는 존재라는 자의적 믿음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취준 시절 말기 한 유튜브 클립을 보았습니다. 아시아인의 성씨로 시작하는 이력서는 읽지도 않고 불합격(No) 폴더로 들어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얼마 안 돼 어느 스타트업 대표에게서 "이력서는 마음에 들지만, 우리는 외국인 비자 발행이 어려운 규모의 회사라 아쉽지만 채용이 어렵다"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저는 근로 비자 여부에 대해 명시하지 않은 채 지원 의사를 보냈습니다). 이 일로 유튜브에서 본 정보가 사실이라 믿었습니다. 상당히 왜곡된 정보가 분명한데도 무기력함과 우울감에 한 동안 어떤 취준 활동도 할 수 없었죠.
그렇다면 왜 취준생을 비롯한 많은 오늘날 사람들은, 혼자만의 세계에 침잠하여 인지왜곡에 빠지며,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괴로움의 고리를 자아내게 된 걸까요?
세계 인구 4분의 1이 우울증의 증상을 한 번 이상 경험한다는 통계가 있듯, 많은 사람이 우울감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우울감에서 회복하여 일상으로 복귀가 가능합니다. 친구랑 술 한 잔 하면서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고 살아갈 힘을 얻죠. 반면 일부는 혼자 힘으로 이것이 불가능한데, 반복되는 또는 막대한 절망감 때문에 중요한 대상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중증 정신질환을 앓았으나 태권도 사범과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을 통한 재활에 성공한 장우석 작가는 우울이나 조울 등 정신증의 대표적인 증상으로 망상을 꼽고 있습니다. 작가님 역시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고 뛰어나고 대단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성격 탓에 현실에서의 실패를 겪을 일 없는 자신만의 망상에 집착하며 가족은 물론 외부와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장기 취준생들의 눈물 어린 고백에 나타나는 스스로의 무가치함, 피해의식, 신경과민 등은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질 때 발생하는 대표적인 증상들이기도 합니다.
자존감의 하락은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과소평가하게 만들며, 해야 하는 일은 과대평가하게 합니다. 무수한 낙방을 경험하며 이력서에 담긴 나의 기술과 경험들은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취업 에이전시나 학원들에서 종용하는 끝없는 스펙들을 갖추지 않은 나는 패배자가 된 기분이 들죠.
취준생 우울증 경험자 인터뷰를 읽어 보면 또래와의 비교 과정에서 우울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13년에 실린 한 기사에서 취준생은 대학 동기들은 다 좋은 직장 다니는데 자신은 4년째 취준만 하는 데서 스트레스와 우울함, 극단적인 사고를 경험한다고 말했습니다. 2020년이 된 현재까지 인터뷰 내용은 별반 달라진 게 없습니다. 대인기피증은 남과 비교당하는 과정에서 멘탈이 깨지는 걸 막기 위한 자기 보호적 반응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관계의 단절로 인한 우울 그리고 불안의 악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