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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m Localinsa Nov 01. 2020

낙인을 이해하고 희생양에서 벗어나기

대중에 의한 낙인보다, 자기 스스로가 부여한 낙인을 조심하라

브런치에 제가 쓴 글 댓글을 통해 소통하며 처음 알게 된, 저와 아주 닮았다 여겨지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멘사 가입 자격을 충족하는 명석한 두뇌, 한 번 꽂힌 일에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매달리는 몰입력, 세상에 없는 것은 사람들 모아 있도록 만드는 추진력 등 여러 모로 닮은 것이 많은 친구입니다.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상처 입기도 여러 번, 몹시 비슷한 방식으로 당했죠. 성공과 행복에 관해 개인과 집단이 마땅히 취해야 할 합리적인 정도(正道)에 대한 지향성과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지녔지만, 사람들의 반대와 시기 그리고 오해에 부딪혔고 그 결과 정신적 상처를 입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20대를 거쳐 30대에 접어들며 두 사람의 삶의 경로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친구는 스타트업 중역이 되어 잘 할 수 있는 일을 보람 있게 합니다. 누구보다 스트레스 없고 맘 맞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취미도 즐기며 워라밸이 충족되는 스타트업 중역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 달랐습니다. 중견 컨설팅 기업에 입사하며 연구원이자 컨설턴트로 회사에서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일을 찾아서 척척 잘 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많고, 사람에 치이며 번아웃과 우울감, 자살과 자해 충동을 종종 경험해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서른에 마땅히 행복하거나 꿈꾸는 게 없었으며 미래를 그리지 못했습니다.



대중낙인과 자기낙인의 차이

사회는 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고 재생산해 왔습니다. 그 고정관념에 동의하고 특정한 생각이나 행동으로 기울게 되면 편견이 생겨난다는 점도 이제는 익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정관념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는 것도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다수 집단에 해당하는 사람이 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사실인 것으로 여기는 경우 ‘대중 낙인(public stigma)’이라 합니다. 고용이나 급여, 인간 관계에 있어 불이익을 주는 등, 흔히 생각하는 편견으로 인한 차별은 모두 대중 낙인에서 기인합니다.


Photography by Kiryu / (c) 서은


그런데 소수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위험하다’, ‘의지력이 없다’와 같은 부정적이고 왜곡된 편견의 페르소나와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는 경우는 다릅니다. 이를 ‘자기 낙인(self stigma)’라고 합니다. 여성, 퀴어, 저소득층, 오타쿠 등 사회의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무능력하고 사회에서 미움받아 마땅한 불필요한 존재로 여길 때 수치심과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주류 사회와 소통이 단절되면 피해의식이나 우울증, 반사회성 등 정신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질환자에 관한 자기낙인은 스스로를 패배자로 보는 왜곡된 인식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낳습니다.


위의 저와 닮은 친구와 저의 경우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저의 친구의 경우 대중낙인을, 저의 경우 자기낙인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오타쿠같고 외골수적인 면에 사람들에게 입바른 소리 못하고 곧이곧대로만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리기 어렵고, 여러 편견에 시달렸겠죠. 하지만 친구의 경우, 설득할 수 없는 세상의 불합리한 부분과 타협하여 현재의 자신이 되었습니다. 반면 저는 "덕업일치"라는 제가 추구하는 대안적 삶의 모델이 몇 번 삐그덕대는 순간마다 저에게 쏟아진 대중낙인을 내재화하여, 자기 스스로 낙인을 씌웠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찍는 낙인이 더 위험하다


다른 낙인도 그렇지만 정신질환에 대한 자기낙인은 정말 위험할 수 있습니다. 분명 처방이 필요한 상태인데도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개개인이 자신에게 필요한 치료와 회복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속한 정신건강 소비자 단체에서 성범죄 피해자를 익명으로 인터뷰한 일이 있었습니다. 피해자 여성은 ‘자기가 제대로 몸 단속을 못 했기 때문’이라는 낙인으로부터 몇 년 간 자유롭지 못 했기 때문에, 시민단체의 개입이 있기 전까지 어떠한 치료도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블루 시대 한국인 세 명 중 한 명은 우울증이라는 통계가 새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실제 정신질환 진단을 받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으며, 그나마 진단을 받은 사람 중 10%만이 실제 치료를 받는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필자의 경험에서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을 저지른,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스스로를 여길 때 우리는 병원에 가기도 상담사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사회적 안전망 내 각종 사회복지 서비스를 찾지도 못 하게 됩니다. 


Photography by Kiryu / (c) 서은


결국 국내에서는 정신건강 소비자의 병세가 중증 질환에 이르러서야 입원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초기에 자기낙인을 극복하고 병원을 찾았더라면 간단한 마음 재활만으로 건강한 일상을 살 수 있었지만, 병세가 나빠지면 장기입원을 해야 합니다.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의 조현병 환자 평균 입원 기간은 OECD 회원국 평균의 6배가 넘는 303일입니다. 국내 정신건강 예산의 9/10가 중증 질환자의 의료복지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자기낙인을 벗는다면, 회복에 대한 합리적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소수자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 사회에서까지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소수자 집단은 주류 집단에 맞설 정치사회적 영향력과 힘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겪는 일상의 불편과 문제는 우리 자신의 노력 부족이나 결함 때문인 것으로 치부하는 프레임워크가 사회에 만연해 왔습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마저 몇 십 년 전에는 학교에서 조현병을 계속해서 악화하는 질병이며, 평생 요양원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단순 노무직에 종사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실제로는 선진국에서 20년 가까이 수백명 조현병 환자들을 추적 관찰해 본 연구 결과, 3분의 2는 적절한 치료만 받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편견과 차별로 움츠러 들고 얼어버린 날개를 다시 펴려면, 외부와의 소통에 기반한 치유와 회복이 필요합니다. 나의 회복을 가장 어렵게 하는 적이 마음 내부의 자기낙인이라는 걸 알았으면 합니다. 이를 걷어내기 위해 조금씩 의식적인 노력을 해 본다면, 나는 다 끝났고 구제불능이라는 생각도 나만의 착각이었음을 알고, 회복될 수 있다는 합리적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의 상처를 깁고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해지기 위한 씨앗은 여기에 있습니다.


Photography by Kiryu / (c) 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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