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am Localinsa Nov 08. 2020

편견을 확증하는 나와 가족의 트라우마에 대처하기


트라우마의 재료, 섬광 기억 피하기


섬광 기억(flashbulb memory)이라는 용어를 아시나요? 정서적으로 충격적이거나 중차대한 순간이나 사건에 대해 평소보다도 훨씬 선명하고 구체적인 기억이 남는 걸 말합니다. 미국에는 9.11 테러를 직접 목격하거나 소중한 사람이 테러로 사망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으로 현재까지도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9.11 테러 당일 어디에서 무엇을 어떤 맛으로 먹고,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어떤 어조로 했는지를 생생히 기억하기도 합니다. 충격적인 역사적 비극으로 인해 그 날의 사소한 감각들 하나하나까지 두뇌에 각인된 섬광 기억의 사례입니다.


섬광 기억은 트라우마의 증거입니다. 트라우마가 생기면 과거에 상처를 야기했던 사건이나 소재를 가족이나 가까운 주변, 혹은 본인이 계속 피하려고 하거나, 비슷한 일에 도전하려 해도 지레 겁먹거나 문제를 들먹이며 과도하게 방해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예전에 한 번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는 데 간섭하지 말라’는 말에, 이미 딸의 이성 관계로 큰 실망과 고통을 느끼신 적 있던 어머니께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성 얘기는 부모님 앞에 거의 꺼내지 않게 되었으며, 이성의 고백을 받거나 깊은 관계를 맺는 일을 회피하고 부담스러워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부정적 사고를 떠올리며 당시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고,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되기 때문이죠. 


일상생활의 사소한 자극이나 사건으로도 다시 그 끔찍한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과도한 불안, 경계, 염려. 타인으로부터 오던 자신으로부터 오든 그 결과는 비슷합니다. 자신의 기질이 끌리는 일, 좋아하는 일을 자꾸만 몰래 하고 거짓말을 하며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을 끌고 갈 때 소수자로서 임파워먼트(empowerment) 그리고 인정받기가 이뤄지긴 어렵습니다.


Photography by 불뽀 / (c) 서은


따라서 내가 추구하는 일이 가까운 사람들 및 대중에게 쉽게 지지받고 인정받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면, 처음부터 트라우마가 될 여지를 최대한 좁혀야 합니다. 낙인을 무너뜨리겠다고 한 번에 강력한 자아 표출이나 저항 행동을 하는 것이 도리어 강력한 섬광 기억으로,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나 소속 집단, 대중의 관념에 강하게 부딪힐수록 조금씩 이해시켜야 압니다. 사람의 적응능력을 고려하여 조금씩 조금씩 생각과 행동을 풀어간다면, 우리가 보기엔 비정상적인 ‘다수자들’의 트라우마적 반응 역시 줄어들 수 있습니다.


정당한 편의 주장하기


취업을 하지 않는 청년이나 동성애자, 오타쿠 문화에 심취하는 성인 등은 주류 집단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상대적 소수자입니다. 이들이 무능력하고, 의지가 박약하며, 반사회적이라는 편견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합니다. 이렇다 보니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괜찮다는 것을 납득하는 데 힘써 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양식을 존중해 주는 사람들을 보면 반갑고 말이 많아지며,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로 파고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의 정체성을 설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나의 불편함을 묘사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주창하는 것입니다. 


대중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합니다. 상대방이나 조직과의 관계에서 마찰이 빚어지면 대화나 조정을 통해 문제를 제거하고자 하며,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대안을 채택합니다. 그런데 소수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와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가 훨씬 적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우울증이나 대인기피증 때문에 남들과 함께 직장에서 근무하기가 어려우면 재택근무나 유연근무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몰래 회사에서 빠져나와 의사를 만나러 갑니다. 


Photography by 불뽀 / (c) 서은


패트릭 코리건 일리노이 공대 석좌교수는 ‘낙인 때문에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는 것은 스스로를 벽장 안에 가두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장애인법에는 ‘정당한 편의’(reasonable accommodation) 규정이 있습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와 사회가 경사로를 제공할 의무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겁니다. 취향이나 기질이 대중에 섞이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측면에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도덕과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을 잘해나가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호소하기보다는 실질적인 불편함을 설명하고 필요한 바를 호소하여 ‘정당한 편의’를 요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정신건강을 책임 있게 돌보기 위해, 나의 마음속 우울과 상처를 비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당사자로서 연대하고, 함께 목소리 내기


여성, 흑인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예전보다 크게 줄어들 수 있던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객관적 사실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며 낙인이 없어졌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이 일반인과 똑같은 지능, 판단력, 사회적 적응성 등을 지니고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발표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차별을 가했습니다. 역사적 분기점이 되었던 것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강력한 당사자 단체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들은 수동적인 벽장 속 수혜자 포지션을 벗어나 사람들 앞에 나서 논리적 주장을 펼치고 사회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이해관계자 집단이 형성되어 중장기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이들의 법적 지위와 권리가 보장될 수 있었습니다.


흑인들은 인종차별적 발언이었던 블랙(black)을, 성소수자들은 조롱의 뜻이었던 퀴어(queer)라는 단어를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사용하는 데 차용하였고 단어의 함의를 바꾸었습니다. 국내에서도 2019년 정신질환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문화예술 축제 ‘매드 프라이드’가 처음 열렸습니다. 이 용어는 1993년 캐나다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정신질환자를 일컫는 ‘매드(mad)’라는 말을 정신질환에서 생존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묶어주는 상징적 단어로 멋지게 변모시켰습니다.


Photography by 불뽀 / (c) 서은


사회 전반에 짙게 드리운 낙인의 구름이 걷히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가장 가까운 이해관계자는 단기적으로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가장 접근성 높은 방법 중 하나는 커뮤니티 모임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지역사회에는 유사한 연령과 관심사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고민을 나누고 조언을 주고받는 다양한 커뮤니티 모임이 존재합니다. 소셜 살롱에서는 낯선 사람들끼리 모여 소통하고 공통의 목표를 서로 간의 지지를 받으며 이뤄나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크리에이터 클럽은 서로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생각과 철학에 대해 판단하거나 충고하지 않는다는 문화 덕택인지, 다양한 성향과 취향, 배경을 지닌 소수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비일상적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며 나 혼자 이상한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을 수도 있고, 함께 책을 읽고 공동의 생각과 주장을 글로 써서 출판하는 등 뭉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라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예민하며 방어적이고 스스로를 벽장 안에 가두곤 합니다. 지독하게 혼자였던 사람일수록 소속 집단이 생기는 것만으로 타인과 사회와의 소통에 자신을 얻게 되며, 생활 전반의 활력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무기력하고 피해의식에 젖어 있던 평소 자신의 이미지를 변모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가장 먼저 평소 나를 죄인 취급하던 가족과 가까운 친구, 연인, 친지들부터 나를 다시 보게 됩니다. 게이머나 오타쿠,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라서 게으르고 반사회적이며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외부의 발언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건 꼭 아니라고 말하게 됩니다. 사회적 관계를 통해 설득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낙인의 대상자에 대한 고정관념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이전 13화 낙인을 이해하고 희생양에서 벗어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