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좋아
비가 좋아.
왜냐고 묻지는 마, 그냥 좋으니까!
저 높은 하늘 위 먹구름에서 땅으로
순식간에 떨어져 버리는 것도 좋고
창가의 알알이 맺힌 볼록한 모양도
빗물이 모여 주룩주룩 흐르는 꼴도 좋고
빗소리는 황홀하지.
특히 비 냄새가 좋아.
비가 온 후 선명해지는 세상도 좋고
비 오기 전 어둑해지며 분위기를 잡는 전조도 좋아
비가 올 때 맛있는 파전 지지는 냄새도 좋고
장화를 신고 첨벙 대는 것도 재밌어.
운전할 때 내 차를 때리는 두두두두 소리도 좋아.
(그날 내 선곡이 멋지다면 더 좋을 테고:)
집에 있다면 좋아하는 향의 인센스를 켜 두고
‘Chet Baker’의 턴테이블을 돌리기도 하지.
10대 시절에는 창문을 살짝 열어 따뜻한 방 안에서 비바람을 느끼며 배 깔고 누워 과자를
집어 먹으면서 만화책을 보는 걸 좋아했어
비를 맞는 것도 좋아.
(나이 먹고 맞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냥 비가 좋아.
아주 어릴 때부터 비가 좋았어
기왓장에 비가 떨어지던 맑은 그 소리
처마 밑에서 비가 몽글몽글 맺혀
땅으로 떨어지는 것도 생생히 기억할 만큼 좋아.
자고 있을 때 희미하게 들리는 빗소리는
내 잠을 더 달게 하지.
비는 음악을 더 듣기 좋게 만들어
비는 모든 걸 더 진하게 만들어
사람의 감정, 살아있는 냄새, 세상까지
비가 오면 왜인지 그냥 기분이 좋아져.
그냥 나는 비가 너무 좋아.
고도리씨랑 산책할 때는 좀 곤란하지만......
그래도 좋아.
좋은 건 마냥 그냥 좋아.
특히 비가 올 때의 그 특유의
페트리코(Petrichor)가 좋아.
비는 흙과 풀냄새가 진동하도록 만들지.
세차게 비가 내리던 날 잠깐이라도
비가 멎길 기다렸어.
소강상태일 때 ‘이때다!’ 싶어 얼른 산책을 나왔는데 직진만 아는 나의 고도리씨가
어쩐 일인지 한참을 가만히 서서
사진처럼 얼굴을 들고 눈을 감고
비 냄새를 느끼며 미소를 짓고 있었어.
오 래 오 래 잠 자 코
이 순간을 기억하려 후다닥 휴대폰을 꺼내
대충 한 장 찍었지.
나도 고도리씨도 그렇게 한참을 서서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비를 느끼고 서있었지. 우리 둘만 아는 그 낭만적인 시간을
난 오감을 다해 기억하고 있어.
고도리씨 너도 기억하니?
우리의 그 순간을.
우린 비가 좋아. 그냥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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