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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whale Jul 25. 2020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요령

내 계획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잘 살아가려면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이 있다. 일의 순서와 방법을 어느 정도 정하지 않으면 불안함이 쌓인다. 준비성 없이 시간을 보내다 꼭 해야 할 것을 못하거나 실수했던 기억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한껏 경우의 수를 따져보고, 행로를 따라 무엇을 할지 윤곽을 그린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보거나 들으면서 참고하기도 한다. 아는 만큼 디테일을 살리면서 스스로 보기에 짜임새까지 갖춰지면, 그제야 안도한다. 이제 자신이 만든 지도를 따라 차근차근 따라가면 될 것 같은데... 계획이 정교할수록 꼭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진다. 내가 그랬다.


진로의 문제 앞에서 누구보다 철두철미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기 전부터 미래의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뭘 먹고살지'류의 생각보다는, '어떤 꿈을 이룰까'류의 공상이 많았다. 인생을 관통하는 운명적인 직업을 만나 행복하게 일하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길 원했다. 그래서 상상만 하던 일을 해보겠다고 아나운서에 도전한 적이 있다. 남보다 늦게 간 군대에서 꿈을 향한 대오각성을 하고는 전역 이후 대차게 방송사 시험판에 뛰어들었다. 누구보다 화면과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며 나 자신을 갈고닦았다.


막상 그 세계에 들어가 보니 생각과 많이 달랐다. 평소 동경했던 흠 없고 단정한 모습은 잘 포장된 외관이었다. 막상 이런저런 일로 현직을 만나 속을 들여다보니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이 많았다. 게다가 몇몇 유명 방송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이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현실에 갈등이 생겼다. 내 입장에서 면밀히 계획하고 발을 뗐으나 앞으로 갈수록 잘못 가고 있다는 경고음이 머릿속에 울리는 듯했다. 또 다른 현실적인 압박과 불편한 마음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가던 길을 멈추기로 결정했다. 인생의 첫 언덕이었다.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적잖게 이어졌다. 새로운 진로를 시도할 때, 낯선 임무를 맡게 됐을 때도 느낌이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세운 계획들은 그다지 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에 마주하여 부딪힌 자리에서 임기응변한 것이 좀 더 효과적이었다. 이를테면 지난 회사에서 팀장으로 일하면서 과거에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역할을 담당했다. 여러 자료를 공부해 만든 깜냥으로 시도해봤지만 현실은 이론과 달랐다. 그 간격을 채우는 것이 늘 숙제였다. 게다가 한 고비를 넘어가면 새로운 고비가 나오니 계획이 맞을 리 없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느낌이 이런 것이 아닐까 했다. 요즘은 이런 감상이 낯설다. 내비게이션 보며 길을 찾듯, 무엇이든 남이 한 것을 보고 따라 하면 쉽게 성취할 것 같은 시대여서 그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 인생은 그런 식으로 풀리지 않았다. 무엇을 간절히 원할수록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만났다. 나 못지않게 내가 원하는 것을 똑같이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때마다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이 와중에 느낀 막막함과 답답함은 계획의 많은 부분이 가치 없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었다.


이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자 세상이 달리 보였다. 내 생애 동안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혹시 계획한 대로 된다 해도 그다음 계획은 무엇이 적절한지 미리 알 방법이 없었다. 또 계획대로 안 된다고 해서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을 먼저 알고 있지도 않았다. 이런 면에서 인생은 정말 불확실했다. 그러니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도, 그것을 바꾸는 것도 당연했다. 이것이 삶의 본질이라면, 한계가 아닌 기회로 보기로 했다. 마치 타국을 여행하듯 차라리 발견하고 경험하는 즐거움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나다웠다.


한번 사는 인생에서
가보지 않는 길을 걸어가려는
저 자신을 꽉 끌어안아 봅니다.
초조하고 두려웠던 길에
흥분과 기대감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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