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공감력을 높이려면
말을 섞을수록 정리가 안 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분명 같은 언어로 말하는데 듣다 보면 대화가 중구난방이 돼있다. 그만큼 화제가 방대한가 싶지만 대부분 별로 그렇지 않았다. 일상적이고 정기적인 주제라도 하고 싶은 말만 하다 보니 그렇게 돼버린다. 바다로 가려던 이야기가 어느새 들과 산으로 가버린다. 뭔가를 정리하고 결정하고자 시작한 말이 짐이자 골칫거리가 된다. 지난 직장 생활에서 자주 뵈었던 분이다. 이런 분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면서 대화의 결말을 효과적으로 이끄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덤이다.
사람을 헤매게 만드는 말에는 공통점이 있다. 말한 사람의 관점만 담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처럼 개인의 입장에서만 주장하고 변호한다. 그러니 소통이 안된다. 소통은 한자말로 물길이 흐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관이 대화하는 사람끼리 생긴 셈인데 이것이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니 그 말뜻처럼 제대로 통했을 리 없다. 일방적으로 말을 한 쪽에서는 뭔가 전달한 듯 느끼지만 결과적으로 대화의 맥이 없어 길을 잃는다. 그러니 말은 많이 듣고 한 것 같은데 지나고 나면 딴 소리가 나오게 된다.
소통의 맥을 잡으려면 상대방의 관점을 내 방식으로 다시 풀이해줘야 한다. 내가 거울을 들고 상대방을 보여주듯 상대방의 언어에 대해 이해한 핵심과 의도를 되받아치듯 말해주어야 한다. 이때 가급적 뉴스에서 들을 법한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면 군말이 줄어든다. 이를테면 보이지 않는 주관을 담은 '느꼈다', '생각했다'보다는, 보이는 사실에 근거한 '보였다', '말했다'는 식의 동사를 사용해 내 입말로 바꾸어 말하는 것이다. 만약 여러 명이 함께 참석하는 회의 석상이라면 마치 퍼실리테이터처럼 진행을 돕듯 말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다.
소통을 주도하고 싶은 나는 이런 적극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저 남이 하는 말을 따라 듣다가 못내 동조하거나 나중에 뒷말을 붙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한 얘기를 다시 정리해주면 마치 공식적이거나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로 느껴진다. 상대방의 말로 재조명된 덕분이다. 내가 정리한 말에 다른 의견이 있거나 본인의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느끼면, 대부분 그 자리에서 바로 말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 난 상대방의 주장을 완전히 파악한 사람이 된다. 이후에 내가 할 말에 상대방이 자연히 신뢰를 갖는다.
이런 공감대를 얻으며 하는 말은 어떤 힘을 갖는다. 여러 사람이 대화하는 중이었다면 마치 모두의 의견처럼 보인다. 한 사람의 주장을 모두가 이견 없이 동의하도록 재정리하는 과정에서 한 가락으로 조율돼 서다. 주로 말을 했던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었다고 느낀다. 말을 덜 했던 사람은 정리된 의견을 따를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처럼 여긴다. 이 과정에서 대화의 고삐를 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정리자다. 수긍하는 범위 안에서 내 의견을 살짝 보태서 정리하면 장삼이사가 자주 실패하는 합의에 의외로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톺아보면 소통은 사실 상대방의 의견에 공감해주는 의미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대로 소통하려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어딘가 쏟아 넣고 비벼서 뭔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가 하려는 말을 시늉으로라도 듣는 노력이 더 많이 필요했다. 설령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과 대화해야 할지라도 결국 그 사람의 말을 재정리해주는 몇 번의 과정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의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수고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내 삶에 오랜 흔적을 남겼던 사람은 모두 이런 태도를 갖고 있는 분들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 원합니다.
상대의 말을 듣고 제가 다시 말할 때
누구 것도 아니었던 대화가
제 것으로 다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