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뭘 좀 하려고 하면 안 되는 이유부터 찾는 사람이 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 '전략'이란 업무의 일부로, '신중'같은 단어를 써가며 아이디어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찬찬히 따지고 보면 접근하는 태도에 달린 결론인데, 내 이야기가 좀 더 중요하게 다뤄졌으면 하는 생각에 반대 측면은 깊이 고려해보지 않았다. 새롭게 시도하려는 일에 어떻게 부정적인 부분만 있었을까. 단지 해본 적 없고, 그 제안이 허황되게 느껴지니 그 부분만 확대해서 받아들이고 '빨간 깃발'을 들었다. 왜 나 자신을 안전 경로를 지키는 보루인 것처럼 굴었나 모르겠다.
가끔은 내 삶에서도 이렇게 행동할 때가 있다. 무언가를 도전하려 할 때 그 대가에 대해 생각하며 경고등을 켜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새롭게 하려는 일이 나답지 못하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처음 회사에서 영업을 하게 됐을 때 그런 딜레마가 있었다. 그전까지 무얼 사고파는 일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배경도 그렇고, 나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사실 나는 그보다 좀 있어 보이는 일을 하고 싶었다. 존경과 사랑을 받고,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직업 말이다. 그래서인지 장사를 상대적으로 낮춰 봤던 면도 없지 않았다.
무언가를 직접 부딪혀 겪어보지 않았는데도 쉽게 단정했다. 머리로 계획하고 고민하면서 그 결과를 가늠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썼다. 그런데 영업을 맡기 전까지 디자인이나 광고, 커뮤니케이션 등 마케팅 지원을 해보니 예상보다 재밌어 보였다. 그저 콘텐츠를 완성하고 효과를 측정하는 평소 일과 달랐다. 이것을 무기 삼아 무언가를 판매하면 즉시 숫자로 결과를 알 수 있고 고객들의 피드백도 받을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동시에 답답했다. 축구를 관전하면서 느끼는 관중의 마음처럼 '내가 하면 저것보다는 더 잘할 수 있겠다' 싶었다.
직감적으로 내가 생각의 성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은 도전하고 싶다고 느끼는데, 생각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특히 인생을 살며 단 한 번도 고려치 않았던 직무를 하게 됐을 때,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닐까 봐 두려웠다. 남다른 가치를 찾고 지키려고 했던 신념이 훼손될까 봐 염려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상황과 여건에 따라 타협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은 내가 생각했던 그럴싸한 일이 아니라는 개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까지 쥐고 놓지 않았던 기준이자 고집이었다. 돌아보니 아집이다.
그 성을 공략하기 위해 우회로를 찾았다. 그 키워드는 '테스트'였다. 시험 삼아해 보고 안 되면 원래대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고, 잘 되면 좀 더 하는 식이다. 그 덕분에 성문이 열렸다. 곧고 바르게 살고 싶을수록 위용을 뽐내던 성에 빈틈이 생겼다. 사용하는 단어 하나를 바꾸자 사고의 틀에 갇혀 있던 내가 자유로워졌다. 그때부터 잡념 없이 주어진 역할에서 최고 성과를 만들어 내고자 집중할 수 있었다. 평소 답답했던 것은 실제로 바꿔보고, 짐작만 했던 것은 실행하며 경험치를 쌓았다. 그 순간에는 몰랐지만 이제 보니 삶의 터닝포인트였다.
성을 벗어나자 알맹이에 대한 목마름이 해소됐다. 삶의 알맹이는 노력의 결실이 드러난 것이다. 예를 들어 영업을 하던 내게는 매출일 수 있겠다. 혹은 절약한 비용일 수도 있겠다. 내가 만든 콘텐츠를 통해 무엇이 바뀌었는지 정량적으로 알고 싶었다. 그저 완성한 것에 만족하기보다 그것을 통해 실제로 누가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보고 싶었다. 이게 진정 원하던 것이었다. 이따금 그 성에서 현실만 보는 듯 느껴질 때 진짜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달릴 수 있는 우회로를 찾는다. 돈키호테처럼 노래 부르며 문을 나설 나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멋지고 그럴싸한
꽃길 같은 인생을 바라다가
삶의 열매를 놓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땀과 수고의 결과를
수확하며 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