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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whale May 29. 2020

내가 누구인지 잘 대답하려면

오늘의 나를 만든 시간을 돌아보며

컴퓨터 폴더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옛날 사진을 보게 됐다. 10여년 전 어느 때인가 싶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촌스러운 헤어스타일과 안경, 옷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좀 더 들여다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 표정도 보인다. 익살스럽게 웃으며 입을 벌려 찍은 얼굴을 뜯어보다 문득 그 시절의 마음이 생각났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당시 나는 '바다 위에 뜬 돛단배'였다. 바닷물이 출렁일 때 그에 맞춰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는 불안한 영혼이었다. 인생의 바다가 좀 잔잔하고 햇살이 비치는 것 같으면 모든 것을 가진 듯 부풀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붙잡았던 고민의 초점은 주로 나의 미래였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인지 많이 생각했다. 어차피 한 번밖에 살지 않을텐데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 고민의 틀은 매번 비슷했다. 10대 때도 그랬고, 20대 때도 그랬다. 30대를 한창 달리고 있던 최근 몇 달 전까지도 그랬다. 답을 찾은 것 같다가 금세 답이 아니었나 싶은 마음에 헤맸다. 확실한 것이 없었다. 어딘가를 향해 잘 달리다가 잠시 멈춰 주위를 돌아보면 나만 엉뚱한 곳으로 달리는 듯했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나도 당시 그런 번민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인생의 불확실성을 마주할 때마다 적지 않게 주저앉았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싶은 마음으로 노력했던 것이 엉뚱한 방향에 치우쳤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적잖게 당황했다. 혹은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일을 막상 해보니 그것을 뒤엎고도 남을 현실의 한계를 마주할 때 마음이 공허했다. 일단 어딘가로 출발하면 남들보다 덜 헤맬 것이라 생각했는데 한참 달린 후,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싶으면 다시 돌아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됐다. 그렇게 달리니 인생에 작은 것 하나도 남긴 지 못한 것 같은 초라함이 생겼다.


과거로 가서 그 마음으로 씨름하고 있는 나를 만난다면 말 없이 꼭 안아주고 싶다. '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담담히 말해줄 것이다. 방황 아닌 방황을 했던 그 시절의 나를 향해 격려의 마음을 담아 악수하겠다. '지금 너의 고민과 도전 덕분에 나다운 인생을 살게 됐다'는 사실을 빠짐없이 알려줄테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예전에 만났던 삶의 갈림길에서 했던 선택이 아쉬웠다 할지라도 그 덕분에 새로운 길을 찾아갈 지혜를 얻은 것이 인생을 살며 배운 점이었다.


그간 걸어온 인생의 길가에는 보석 같은 것들이 있다.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했던 일 속에 있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 기꺼이 행동하게 했던 신념이다.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그 믿음이 만든 가치를 종종 알아봐줬다. 이를테면 나는 꽤 꼼꼼했다. 남자임에도 '엄마'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사람과 일을 챙기는 데 유별났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 주목하거나, 일을 진행하는데 결정적인 사항은 아니지만 완성도를 높이는 디테일을 신경썼다. 남과 좀 다른 관점으로 보려고 애썼던 마음이 일상에서 드문드문 드러났다.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누군인지'를 웅변했다. 때로 남 보기에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 속에서 직접 겪으며 모은 것이기에 값은 내가 매기는 것이었다. 설명할 수 있으나 팔 수는 없고, 묘사할 수 있으나 만들 수는 없다. 딱 한 번 사는 내 삶이 빚은 진주 같은 것이기에. 이것을 안 오늘의 나는 닻을 내린 배처럼 바다 위에서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이 곳은 더 이상 절망의 이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 있는 모험의 무대로 다시 보게 됐다. 배가 좀 익숙해진 선원이 다시 할 일은 배를 움직이는 것뿐일테니.


걷기 전에는 알 수 없고
걸었다고 할 지라도
인생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으며
배우는 제가 있으므로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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