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세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 하루의 깨달음
오늘의 증상:14시간 숙면. 왼쪽 귀에 약한 이명 있었으나 약 복용 후 개선.
힘들었던 5일간의 회사 복귀를 끝내고 맞이한 토요일.
친한 언니가 “정재찬 교수님 강의가 있다, 같이 가자”는 말에 따라나섰습니다. 주제는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덕분에 오랜만에 보수동 헌책방 거리 나들이를 했습니다.
보수동은 6.25 전쟁 시절 피란민을 위한 천막학교 인근에서 중고 참고서를 팔던 곳에서 시작해, 부산의 명물이 된 책방거리입니다. 저도 학창 시절, 헌책방에서 참고서를 사며 새 학기를 맞곤 했지요. 책은 늘 새것처럼 깨끗했지만, 정작 공부보다는 ‘사기만 해도 뿌듯’한 기분에 만족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새것 같던 헌책’을 진짜 헌책으로 만들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네요.
세월이 흐르며 책방거리는 많이 줄었지만, 저에겐 여전히 ‘보물찾기’의 설렘이 있는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강의가 열린 곳은 책 모양 건물 ‘아테네 학당’. 정재찬 교수님의 주제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시 읽기’였습니다. 저는 미혼이지만, 강의를 들으며 오랜만에 큰소리로 웃다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눈물이 핑 돌았답니다.
저는 시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역사·철학·심리 같은 인문서를 좋아하고, 학창 시절에는 ‘형식과 심상’을 찾는 데만 매달렸기에, 시는 늘 과제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날 만난 시는 달랐습니다. 마른 오징어같이 말라붙은 제 마음에 수분을 채워주고, 오래 잊고 있던 감성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늘 ‘출고’만 강요받던 제 삶에, 이제야 ‘입고’가 필요했음을 깨달았다고 할까요?
강의 후에는 축제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겼습니다. 특히 “책 처방” 코너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회사에서의 어려움, 억지로 독해지려 했던 지난날, 그리고 감성에 말랑함과 유연함을 더해주고 싶다는 바람을 주절주절 털어놓았습니다.
선생님은 끝까지 들어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독해 보이지 않아요. 억지로 독하려 하니까 더 힘든 거 아닐까요?”
그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20년 직장 생활 동안 제가 추구했던 건 ‘만만치 않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홍시처럼 누구나 찔러볼 수 있는 물렁한 존재였던 저는, 동기 언니처럼 파워 당당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고, 적어도 겉으로는 그 점을 완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한 주, 회사에서 억지로 가시를 세운 생활은 너무 피곤했습니다.
‘진정한 강함은 억지로 만든 독함이 아니라, 내 안에서 길러낸 유연함과 의연함이 아닐까.’
제 마음은 아름다운 언어와 감성, 그리고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래서 저는 강퍅한 제 마음에 유연함과 아름다움을 더 해줄 시를 읽기로 했습니다. 언니는 시집을 선물해 주었고, 선생님이 처방해 주신 책도 주문했습니다.
그 결과는요? 어제 오후 6시에 잠들어, 오늘 아침 8시까지 무려 14시간 숙면. 그것도 수면제 없이요.
책과 사람, 그 두 가지가 제게 가장 따뜻한 처방전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처방 덕분에,
다시 앞으로 나아가며 살아낼 힘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