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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Sep 19. 2021

직장에서 친구 만들기 가능한가요?

장류진의 '잘 살겠습니다'를 통해 본 직장인 친구

수학 문제를 어렵지 않게 가르쳐 준 친구, 고등학생일 때도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친구, 도쿄 밤도깨비 여행을 처음 같이 간 친구, 이태원 수입 옷 가게를 처음 데려간 친구, 마마스 청포도 스를 처음 소개해 준 친구. 나의 처음을 수없이 같이 해 준 친구와 함께 한 시간을 떠올려 본다.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친구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 네이버 지식인으로 통했는데 이 친구의 박학다식함과 넓은 정보력은 어디에서나 빛을 발했다. 함께 여행을 할 때는 여행 준비부터 뒤풀이 정산까지 모든 걸 도맡아 정리해주는 친구여서 부모님도 어디든 믿고 보내는 친구였다.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고도 저녁엔 다음날 코스를 확인하고 자신이 정한 식당이 마음에 드는지를 나에게 묻는 친구였는데 이때 나의 역할은 침대에 퍼져 너무 좋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어떤 모임에서는 반대로 내가 아무 일도 안 하는 친구에게 '야! 너 뭐하냐고, 일어나라고!' 버럭 하기도 했으면서 그 친구와 함께 할 땐 친구의 자발적인 즐거움이라 믿으며 태평하게 누워있곤 했다. 난 참 실한 인간이었다.


바지런하고 똑똑한 내 친구는 역시나 나보다 먼저 취업을 했고 당연히 돈도 먼저 벌었다. 취업준비생으로 처박혀 지낸 시간에도 친구는 멋진 직장인이었고 취업 이후에도 더 많은 월급을 번다고 좋은 음식점에도 많이 데려갔다. 내가 직장생활 인간관계에 허덕일 때 친구는 모든 것에 초연한 사람처럼 현실이라는 감각을 제 손안에 넣고 쥐락펴락 하는 신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더욱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와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나는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욕먹는 건 끔찍이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기에 사회생활을 위해 주변의 능력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행동이나 말투를 따라 했다. 최소한 저렇게 하면 욕먹는 일은 없겠지 하며 모델을 찾아냈는데 나의 직장생활 첫 모델은 사수나 직장 상사가 아닌 바로 내 친구였다. 모임의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실수가 없으면서 친구들의 마음도 잘 헤아리던 친구. 애초에 내게 없는 센스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지만 비싼 밥값을 낼 때라든지 내가 좀 더 많은 노력을 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려운 일을 맡았을 때의 자기표현은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무리하게 생색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역할을 어필하고 서로 기분 좋을 수 있게 하는 얼굴 표정, 조금은 애교 섞인 당당한 목소리 같은 것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 원을 내야 오만 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 이천 원을 내면 만 이천 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이 거고......."p28 [잘 살겠습니다, 장류진]


장류진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에 실린 첫 번째 작품 ‘잘 살겠습니다’에서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그렇지, 그렇지 크게 맞장구쳤다. 이런 경험은 있지도 않았으면서 희한하게 주인공에게 몰입되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며 빛나 언니 정신 좀 차리라고 같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계산기를 들게 한 빛나 언니를 다시 한번 미워했다. 만 이천 원의 선물에 감동하는 바람에 상대만 계산적인 사람 만들어 자괴감까지 선물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흥분을 하다 보니 이상했다. 난 이런 경험이 없는데. 왜 주인공에게 몰입한 거지?      


생각해보니 친구와의 관계에서 나는 오히려 빛나 언니에 가까웠다. 여행 계획도 늘 친구가 세웠고 하물며 아이를 키울 때도 친구는 육아 꿀팁이나 아이템들을 아낌없이 제공해주었다. 나는 그저 넌 정말 대단하다는 말로 해맑게 거저 얻는 것이 많았고 친구는 화수분처럼 끝없이 무언가를 내놓았다. 그런 내가 직장에서 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올챙이 적 모르고 빛나 언니에게 정신 차리라는 말을 하고 있다니. 친구는 내게 친구로서의 선의를 최대한 베풀면서 직장에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그만한 역할을 해냈을 텐데 나는 선택적으로 직장인의 모습만 배운 것이다. 친구가 내게 끝없이 베푼 사랑과 우정은 '친구니까' 당연하게 여기면서.



친구로서 내 역할, 직장인으로서의 내 역할은 분명히 다르다. 직장동료에게 친구 몫의 역할을 하라고 기대할 수 없고 나 역시 동료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안다. '잘 살겠습니다'를 보며 나는 직장인 '나'에게 몰입했지만 친구와 함께 있는 나를 생각하니 내가 늘 '나'의 역할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됐다. 두 가지의 모습이 공존하는 것이다. 빛나 언니는 회사에서 '나'를 친구로 여기며 결혼 준비에 대한 조언을 듣고 함께 불안함을 나누려고 했다. 비록 '나'에게 좋은 친구는 아녔을지 몰라도 기브 앤 테이크를 생각하지 않는 조금 느슨하고 편한 관계로.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직장동료와 친구사이.

여기까지는 직장인, 여기까지는 나의 영역, 선 넘지 마세요.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있을까? 오히려 이 단편을 통해 만 이천 원짜리 축하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고 특 에비동에도 새우가 작을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됐다. 나는 여전히 직장과 내 삶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 친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 많이 외롭다. 지금까지 친구에게 딱 부러지는 직장인의 모습을 배웠다면 이젠 호의를 베푸는 마음도 따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분명 친구도 친한 직장인 친구가 있을 테니까. 


'잘 살겠습니다'라는 문장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직장에서 친구는 무슨~ 뒤통수 맞을 줄 알았다! 결국 후회하더라도...


직장에서도 친구로 지내려는 노력을 하려 한다.

점심시간 산책을 하며, 야근을 하며 서로의 안부를 챙기는 사소하고 중요한 일들을 빠트리지 않다 보면 직장이 때론 나의 도피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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