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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Feb 06. 2020

제 꿈은 엄마가 되는 거예요.

우리 둘째 눈에 비친 나의 모습

 “우리 첫째 공주는 뭐가 되고 싶어?”

 “나는 화가! 화가가 되고 싶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화가가 되고 싶어. 엄마가 아빠랑 싸워서 속상할 때 내가 위로해 주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고 했잖아. 근데 내가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니 엄마가 기분이 나아졌다고 했지? 그림이 그런 역할을 한다면 그게 바로 행복을 주는 거잖아. 나는 그런 화가가 되고 싶어.”     

 

말로하는 위로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날 아이가 가져온 그림이 나를 웃게 했다. 특별한 그림은 아녔던 것 같은데 그냥 그 아이 마음이 너무나 따스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괜찮은지 슬쩍 왔다갔다 하며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과 나를 위해, 오직 나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라는 점이 퉁퉁 불어있는 내 얼굴에 곧바로 미소를 찾아 주었다. 그때 나는 아이를 안아주며 말했다.     

“엄마가 너무 속상해서 우리 예쁜 딸이 하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네가 그린 그림을 보니 말하지 않아도 위로가 되네. 정말 따뜻한 그림이다. 고마워 엄마 기분이 나아졌어.”

나의 진심이기도 했고 그림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 그 아이의 마음이 고마워서 했던 말이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인 데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경험이 쌓이니 당연히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늘 화가라 답하는 첫째였다.


반면 둘째는 특별히 무얼 좋아하는지 모르겠고 무엇에 특히 관심을 쏟는 타입이 아니어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었을 때 대답을 예상하기 어려웠다. 6세 아이가 자신의 꿈을 확정하는 일이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때그때 아이의 관심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정도로 나는 자주 묻는 편이다.     

“그럼 우리 둘째는 요즘 꿈이 뭐야?”

“나는 엄마! 엄마가 되고 싶어!”

웬일로 둘째가 고민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엄마라는 대답이 의외였지만 질문을 계속했다.

“엄마? 엄마가 좋은 것 같아? 엄마가 되면 뭐하려고?”

나는 엄마처럼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카페에서 책 볼 거야”


나는 이 대답에 빵 터지고 말았다. 엄마가 돼서 아이를 돌보고 요리를 하고 이런 대답을 기대했는데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카페에 간다니. 너무 웃겨서 가족들과 이 에피소드를 나누고 며칠이 지났다. 유치원에서 꿈을 적는 활동을 했는데 같은 맥락의 내용이 담긴 활동지를 가져왔다. 우리 둘째가 쓴 내용은 엄마가 돼서 운전을 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운전을 하는’ 엄마의 기능이 추가되긴 했으나 어쨌든 유치원에 보낸다는 내용이 또 나를 웃게 했다.

“아니 너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게 그렇게 중요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뭐하려고 자꾸 유치원에 보내?”

“엄마처럼 카페에서 책 보려고” 뜨끔하기도 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너는 책 안 좋아하잖아. 책 안 좋아하면서 왜 자꾸 책을 본대? 무슨 책 보려고?”

“엄마가 읽는 어른 책 다. 무조건 엄마가 보는 책 다 볼 거야”



누군가는 이런 답을 들으면 뜨끔해하며 엄마가 하는 여러 일들을 아이에게 구구절절 어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대화에서 그것을 강조하지 않은 이유는 평소에 다른 이야기로 어필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굳이 이야기하지 않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꼭 네가 원하는 엄마가 되라고 격려도 잊지 않고.     


사실 둘째 아이의 마음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엄마란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여유를 가진 사람으로 비친 것 같아 그냥 그것만으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엄마가 지지리 궁상으로 보이거나 엄마는 늘 힘들게 집안일을 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카페에서 책을 보는 엄마로 비친 것이 시어른들께는 송구스러운 면모도 있지만 딸을 가진 엄마 입장으로 나쁘지만은 않았다. 적어도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라고 결심하는 딸이 되진 않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안심됐다.     


 우리 첫째가 3살 무렵부터 6살까지 정말 잘 보던 생활동화가 있다. 추피라는 펭귄 아이가 주인공인데 프랑스 생활동화여서 가족 문화나 기념일 등 우리 생활권과 다른 에피소드가 많아 내가 보기에도 흥미로운 책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엄마는 늘 컴퓨터 앞에서 일을 했고 아빠는 마당에서 아이와 웃고 울고 싸우는 에피소드가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추피 엄마가 486 큰 컴퓨터 모니터에 얼굴을 고정한 채 추피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당시에는 재밌지만 우리나라 현실과 참 다른 동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추피 엄마가 되어 있다.

글을 쓰기로 결심한 후부터 나는 매일 밤 글을 쓰려고 노력했는데 아이들을 재우고 쓰려다 보니 컴퓨터 앞에 앉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 되었다. 지속적인 습관이 되려면 조금이라도 끄적여 놓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 아이들이 자기 전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너무 관심을 가져서 한 문단도 완성하지 못했는데 몇 번 시도하니 이제는 아이들이 서로 자판을 두드리는 나를 흉내 내며 자기들만의 놀이를 하게 되어 뜻하지 않게 나도 나만의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중 엄마 역할을 하는 우리 둘째는 이런 말을 했다.

“엄마 글 쓰는 중이야. 이것만 마무리하면 같이 하자”

 때로는 이런 말도 한다.

“엄마가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어. 오늘 저녁엔 아빠랑 좋은 시간 보내”


엄마 흉내를 내는 아이의 입을 통해 이런 말들이 나오자 나는 두 가지 감정이 들었다. 엄마의 역할이 너무 나 중심이었나? 하는 미안함과 엄마의 역할을 확장한 것 같은 선구자적 자긍심. 하지만 전자의 마음은 아주 약간 나를 스칠 뿐 나는 아이들의 이런 역할놀이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한때는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가 좋은 이유를 물으면 늘 이런 대답을 하곤 했다.

“엄마는 우리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잖아.”

“엄마가 좋은 이유가 그냥 요리를 해 줘서였어?”

“어. 엄마는 매~일 요리를 하잖아. 아빠는 가끔 짜장라면을 끓여주지만”

아이들 대답의 핵심이 매일의 헌신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해도 나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의 정체성은 ‘매일 요리하는 사람’이 아닌데 하는 씁쓸함이 따라왔다.     


나는 이제 자랑할 수 있다. 우리 둘째는 엄마가 되고 싶어 한다고.

책 보는 엄마, 카페 가는 엄마, 글 쓰는 엄마가 되고 싶어 한다고.

엄마 앞에 요리하는 엄마, 아이 보는 엄마가 아닌 다른 수식어가 생겨 기쁘다. 오히려 일할 때는 보여주지 못한 엄마의 모습을 쉬는 동안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어 행복하다. 쉬는 동안 집안일하는 모습만 보이지 않고 여러 가지를 누릴 수 있는 엄마의 모습을 제시하며 나도 기쁘고 너도 꿈이 될 수 있어 행복하다. 안데르센 동화의 왕자님 의존적 동화를 탈피해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나는 디즈니의 만화영화처럼 내가 새로운 엄마의 모델이 된 것 같아 으쓱하다. 나의 행복이 나의 행복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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