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이번에 한국에 가니, 1998년 첫 출판된 소설이 빳빳한 양장질로 재판되어 다시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려 했으나 걸어놓은 예약대기가 귀국 전날까지 그대로였기에, 한 권을 사서 돌아왔다. 첫날은 산만한 상태로, 둘째 날은 앉은자리에서 마지막장까지 한숨에 읽었다.
나는 소설을 잘 못 읽었었다. 하지만 요 근래 소설도 제법 잘 넘어간다. 나름 이유를 분석해 보자면 소설, 그까짓 지어낸 이야기라던 건방이, 고개를 좀 숙인 것 같다. 수필이 활어이고 소설이 소금에 재워 구운 고등어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것만 취급한다는 건방이었다. 소설을 읽을 때, 상상력이 필요한 수필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도움이 되곤 했다.
1998년에 읽지 않고, 2025년에 읽어서 다행이다. 살아온 만큼 보인다. 원인과 결과가 학창 시절 과학실에서처럼 분명하지 않은 삶인데, 콩을 넣었는데 팥죽이 나오기도 하는 이 삶을 1998년에는 매우 비웃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불만이라고 한 카피라이터 정철님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복에 받쳐서 요강에 똥 싼다는 말로, 행복해하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에 경멸의 말을 던지는 이에게 속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작가는 이야기 여기저기에 조곤조곤 심어놓았다.
"너의 문제는 불행이 아니라 불만이란다."
안진진은 놀라울 만큼 냉정하게 처한 현실을 바라보고 처신하는 현명한 여자다. 그녀의 어머니만큼. 그녀의 어머니가 쌍둥이 동생에게 품은 적개심은 인간미로 봐줄 수 있을 만큼. 안진진은 결국 장우가 아닌 영규와 결혼을 한다. 2002년 나에게도 필요했던 냉정이지 싶다. 아... 아닌가, 2002년에 결정이 어떠했더라도 삶의 모순은 분명 나에게 장난질을 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하다.
"가만있어봐. 실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수도 있어. 그렇게 불공평하지만은 않았을 수 있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을 수 있어."
갑자기 저 멀리서 불빛이 들어왔다 쌩하고 지나간다. 그런 순간이 있나. 찰나의 깨달음.
이 책, 모순은 나에게 왔던 찰나의 불빛을 멱살 잡고 내 앞에 다시 끌고 와 주었다. 책 앞에 서서 살까 말까 할 땐 일단 사자. 근래에 스치고 간 찰나의 깨달음을 운 좋게 책꽂이에 오래 꽂아둘 기회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