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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A Jul 01. 2024

귀 기울여라.

8할이 아는 이야기여도

"3명이요."

부모님이 버스 앞쪽, 나란히 있는 두 자리앉으시는 걸 확인하고 뒤쪽으로 가서 앉는다. 오늘은 삼각지에 있는 맛집을 거쳐, 서대문 형무소까지 가보기로 한다.


보슬비처럼 내리던 삶의 과제들이, 어느 날 소나기가 되고, 태풍이 되고, 장마가 고, 홍수가 되었다. 거기서 간신히 건져낸 살림살이로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숨 좀 돌리며 고개를 들었는데 하늘엔 여전히 먹구름이다. 공황장애가 왔다. 아빠의 이야기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고 했지만, 아빠는 칠순이 되어서야 정년퇴직을 하셨다. 퇴직과 동시에 원인 모를 공포감에 심장이 두근거려 병원을 가셨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으셨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팬데믹때문에 좋아하는 외출도 모두 중단이 되었다.


가만히 앉아 계셔도 어지러워 잘 드시지 못하고, 수시로 응급실을 찾아야 하는 아빠를 위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집밥으로 삼시 세 끼를 챙기셨다. 내가 없는 사이 잔다르크가 되고 나이팅게일이 되었다. 엄마의 이야기다. 엄마는 신경성 구강 건조증으로 물과 껌을 항상 가지고 다니신다. 이미 오래된 갑상선 저하증과 자꾸 올라가는 간 수치, 허리디스크로 오래 걷지 못하시는 것에 더하여.  그래서 사실 엄마는 집에 있는 것이 제일 편하다 하신다. 아빠만 퇴직하시면 같이 좀 편해지려나 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계속되었고, 엄마는 무슨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외출이 두려워졌다 하셨다.


미국으로 돌아와 떠올려보자니 사실 누가 누구를 배려했는지 모르겠다. 집에 계시고 싶은 엄마가 평일 낮에 서울시내를 활보하는 게 꿈이었던 딸을 배려한 건지, 나가고 싶지만 엄두가 안 나던 부모님을 내가 도와드린 건지.


앞쪽에 앉아계신 부모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뽀글뽀글하게 말아 올린 파마머리 엄마와 베레모를 쓰신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철없던 어린  뒤통수를 바라보는 당신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는 사이,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내가 있는 쪽으로 오신다. 그리고는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앉으신다.


"너랑 떠들고 싶어서."


엄마는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를 만지작거리시며, 어제 있었던 얘기, 그제 있었던 이야기, 윗층 할아버지 이야기, 옆집 할머니 이야기, 맛있는 비빔면 이야기, 맛없는 비빔면 이야기, 그때 그날의 마음 이야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풀어놓으신다. 사실 이런 소소한 이야기로 바구니가 채워지기까지는 엄마와 나 사이에 참 많은 시간이 걸렸고 많은 다툼이 있었다. 태평양만큼 몸과 마음의 거리가 생기면서 비로소 이런 이야기들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내 옆에 딱 붙어 쉼없이 이야기하시는 엄마를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시에 보태본다.




춤추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리고...

귀 기울여라.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비록 이야기의 8할이 이미 다 들은 이야기일지라도.  



삼각지에 도착해서 여유 있게 이른 점심을 먹고, 아름드리 버드나무 아래 앉아 다 같이 이도 쑤셔본다. 방금 먹은 거 트림 한 번으로 소화시키고 또 입안 가득 베어 물고 싶은 단팥빵집 빵 향내를 맡으며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서대문 형무소로 가는 버스는 아까 우리가 내린 그 자리에서 이어진다.


외국인 출연자들이 서울 곳곳을 견학하는 예능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궁금하셨다는 곳, 서대문 형무소에 도착한다. 아빠는 그토록 궁금하던 곳이 겨우 버스 한번 갈아타면 올 수 있는 곳이었다는 사실에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감탄사를 연발하신다. 우리는 모두 입구에서 만난 유관순 열사의 동상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아우내 장터가 지금 실현된다면 유관순열사처럼 맨 앞줄은 아니더라도 두어줄 뒤에서 분명히 그녀에게 힘을 보태지 않았을까 열을 내어본다. 올림픽과 월드컵같은 국가대표경기에만 흥분하는 우리는 피가 끓다가 숙연해지다가 슬퍼지는 서대문 형무소를 샅샅이 훑는다.


서대문 형무소 앞에 있는 독립문역에서 지하철로 귀가하기로 한다.

자리를 찾아 앉아 계시던 부모님이 도중에 일어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할아버지 두 분께 자리를 양보하신다. 이 모습을 보는데 한국 입국 첫날 현란한 주차솜씨를 뽐내시던 아빠를 볼 때와 같은 안도감이 든다. 아직은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초기노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후기청년이라고 합니다. 나이에 0.8을 곱한게 실제 체감나이라고 하는 전문가들의 말이 위로가 되는 내 마음처럼 당신들보다 더 연세많으신 분들께 자리를 양보하시는 마음도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집 앞 지하철 역에 도착해 아파트 뒷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앞서 가시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직진 순재 닮은 아빠는 어느 사이 아파트 뒷문을 들어서고 계신다.

"얼른 온나. 엘리베이터 왔는가 보다."

뒤따라 가시던 엄마,

"먼저 가라 카이소~ 근데 오늘 저녁은 뭐 묵지?"


급하게 가느라 미처 챙기지 못하고 한국에 두고 왔던 시간, 참말로 다행이다.

천천히 다 쓰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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