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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A Jun 24. 2024

오만원

아끼다 똥 돼.

우리 중,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만장일치의 여행지, 원도 양양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아침 일찍 서둘러 일어나 바닷가로 나왔다. 모두가 잠든 사이, 고요한 바다를 듣고 싶었다. 우리말을 하는, 그래서 번역이 필요 없는 우리 바다. 그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집 나갔던 필력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핸드폰 메모장을 열고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생각들을 썼다. 

해가 제법 올라온 후, 삼삼오오 사람들이 바닷가로 나오는 길을 거슬러, 숙소로 돌아오니, 부모님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계셨다.


"일찍도 일어났네. 사우나 갔다 왔나?"


맞다! 불현듯 아침에 들고 나갔던 오만원권이 생각났다. 리조트 내에 있다는 사우나를 혹시 가게 되려나 싶어 챙겨간 현금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이마에서 땀이 빠직하고 소리를 낸다. 주머니를 아무리 털어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핸드폰을 넣다 뺏다 하는 사이, 흘린 것 같다. 왔던 길로 한참을 뛰다 걷다, 걷다 뛰어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한국 입국 후, 다음날 엄마가 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는 반듯하게 두 번 접힌 오만원권을 내미셨다. 


"니 현금 쓸일 많지? 이거 써."  

"엄마, 저 현금 있어요. 괜찮아요."

"니 써. 나는 쓸 일 없어. 아끼다 똥 돼. 너나 와야  일이 생기는 거야."


신사임당 얼굴이 엎치락 뒤치락하며, 엄마와 나 사이를 오고 가다, 끝내  돈은 내 손에 쥐어졌고 엄마는 황탯국 끓어 넘친다며 급히 나가셨다.


카드만 사용하는 나에게 현금 오만원권이 이렇게 들어왔고, 그 돈이 아무리 털어도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엄마가 아끼다 똥 될까 나에게 넘겨주신 돈을, 결국 똥을 만들어 버렸다는 자괴감에, 방금 전까지 집 나간 필력 회복시키는 고마웠던 바다, 이젠 내 돈 삼킨 얌체로 보였다.


'차라리 받지 말걸, 받았으면 바로 쓸걸, 주머니에 넣지 말걸. 아침에 나가지 말 걸, 핸드폰 꺼내지 말걸.'


집에서 챙겨간 각종 반찬에 따끈히 데운 즉석밥이 아까 밟고 다닌 모래알처럼 입 안에서 깔깔했다. 아무래도 미국에 있는 남편에게라도 고해성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엄마가 아끼고 아꼈다 주신 오만원을 잃어버렸어, 방금 바닷가에서. 너무 속상한데, 어쩔 도리 없는건 아는데, 그런데 자꾸 생각나고 엄마한테 죄송하고. 그래서 이 생각으로 오늘 하루 망가뜨리지 않을 지혜가 필요해."

"잃어버린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생각해 봐. 그 돈을 딸에게 꼭 주고 싶으셨던 엄마의 마음 같은. 그래서 그 마음에 보답하는 행동을 하는. 예를 들면, 함께 있는 동안 엄마를 더 많이, 더 자주 안아드리는 것 같은. That's what matters."


이후, 쉽지는 않았지만, 남편이 말한 더 소중한 것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엄마를 더 많이, 더 자주 안아드리는 것과 같은.


엄마는 그후로도 수시로, 내 주머니로, 내 지갑으로, 오만원권을 쑤셔 넣으셨다. 출국 전날까지도. 마지막으로 지갑을 여신 날에는 오만원권이 아닌 만원짜리 다섯장을 건네셨다. 엄마의 지갑을 슬쩍 건너다보니 천원권 장만 보였다. 아끼다 언제 똥으로 둔갑할지 모르는 돈을 서둘러 털어낸 지갑만큼 엄마의 표정도 가벼워 보였다. 그래서 군말없이 그 다섯 장의 만원을  받아 들고 온 가족 좋아하는 순대볶음을 한아름 사 왔다.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오늘이 또 마지막이네, 맛있는 거 더 사주고 싶었는데, 아쉽다.'

이젠 아끼다 똥 될 쌈짓돈도 없으신 엄마가 말씀하셨다.


미국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돈을 보내드렸다.


"너 여기서 돈 많이 썼는데, 이건 또 뭐 하러 보냈니. 참말로."


내가 대답했다.

아끼다 똥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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