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노로 살다가 피렌체(도시) 도망친 김똘똘의 자손에게 그럼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십자군 원정을 따라 무역로가 생겨났고 유럽과 이슬람 지역의 중간에 있었던 이탈리아에는 도시국가가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로 가면 농노도 자유민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흑사병이 번져서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던 피렌체는 인구가 10만 명에서 6만 명이나 줄어서 이제는 인구 4만 명의 도시가 되었죠. 그 덕분에 사람의 값어치는 상승하였습니다. 막노동해도 이전보다 훨씬 많은 품삯을 받을 수 있었죠.
김똘똘 씨의 자손 중의 하나가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도시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는 피렌체에 자리를 잡고 금융업에 종사하거나 당시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금세공사 길드에 가입해서 자신만의 공방을 운영했습니다. 더는 농노가 아니고 어엿한 도시의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이제 돈도 벌고 중산계층이 되었으니 강남 부모처럼 부의 세습을 위해서 교육에 치맛바람 좀 날려볼 차례입니다. 아들을 잘 나가는 공증인을 만들기 위해서 일찌감치 라틴어 학교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제 김똘똘에 자손에게는 신분에 어울리는 김졸부라는 이름을 붙이겠습니다. 졸부는 아버지와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소송이나 계약을 할 때 글을 제대로 몰라서 쩔쩔매며 공증인에게 모든 걸 의존했지만, 라틴어 학교를 졸업한 졸부는 공증인이 쓴 계약서를 스스로 읽어보고 이것저것을 따져본 후에 사인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학을 좔좔 읊었습니다. 졸부는 눈치 있는 아버지를 닮아서 영민했고 어떻게 해야 아버지의 가업을 번창시킬 수 있는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당시 그리스 철학과 인문학은 지식인들에게는 필수 교양이었습니다. 메디치가에서 운영하는 플라톤 아카데미에 들어가 인문학에 대한 소양을 쌓았을 뿐 아니라 피렌체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들과 인맥을 만들어 갔습니다. 이들과 인문학과 미술을 주제로 토론하고 라틴어 미사를 듣고 광장에서 사람들과 신앙에 대한 본인의 의견도 피력했습니다. 최소한 피렌체 성당에서는 김똘똘이 다니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신자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김똘똘처럼 세상에 신이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슬람 상인들과 교류를 통해서 그리고 주변에 금융업을 하는 유대인을 보고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신의 이야기를 읽으며 수없는 신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엘리트 신자들은 교회의 신부뿐만 아니라 추기경도 자신들이 원하면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성직자들이 쓰는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누군지 성직자들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방식으로 설교를 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옛날처럼 하느님을 맹신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제단화에도 이제 변화의 바람이 필요한 건 어쩜 당연한 일이었죠.
교회는 이제 이 고퀄리티의 신자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수준 높은 제단화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필요들이 피렌체에서 예술이 꽃피우기 시작한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 보르자
-열린 세상이 바꾼 피렌체-
르네상스는 사생아들에게는 황금기였습니다. 물론 왕위까지 물려주는 나라는 별로 없었지만요. 귀족계급에서 사생아로 태어나는 것은 인생의 걸림돌이 아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던 시대에 교황이었던 알렉산데르 6세는 많은 사생아 아들이 있었고(교황이 아들이 있다는 것도 황당한데 게다가 줄줄이 여러 명(?) 이 시대 종교인들의 타락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합니다. 이러니까 종교개혁이 일어났겠죠!!!) 그 아들 중 한 명이 훗날 레오나르도의 고용주이기도 했던 체사레 보르자입니다. 보르자는 추기경, 교황 총사령관의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홍길동 같은 서러움은 받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중산계급의 사생 아였었던 레오나르도에게는 조금 다른 기준이 적용되었습니다. 어느 사회나 중산계급은 신분 유지와 상승의 욕구가 강한 것은 마찬가지여서 상류층보다 오히려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었던 거죠. 특히,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는 신뢰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공증인이었지 때문에 공증인 길드에서는 사생아는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생아로 태어난 것이 숨길 일이거나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할아버지와 빈둥빈둥 되는 걸 즐기는 삼촌과 함께 피렌체 근처의 시골 마을에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늦도록 다른 자식이 없었던 아버지가 피렌체로 다빈치를 교육한다고 불러올리기 전까지는 유유자적 공부 스트레스 없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부럽죠? 하지만, 인생이란 게 역시 당장 좋다고 그게 다는 아니랍니다. 라틴어 학교를 안 다닌 덕분에 그 시절 엘리트라면 꼭 알아야 하는 라틴어를 몰라 평생을 라틴에 사전을 끌어안고 끙끙대며, ‘난 무학자야!’라고 괴로워했다고 하니 성경, 고전, 인문학 대부분이 라틴어로 쓰인 그 시대에 살면서 스트레스 꽤 받았나 봅니다. 역시 졸부아버지의 선택이 옳았습니다. 배워서 남 주는 일은 없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다른 길로 샜는데 어쨌든 이 시대의 사생아는 공증인 길드 같은 특별한 길드가 아니면 가입할 수 있었고 공작이나 추기경도 될 수 있는 사회였으니 정말 열린 세상이었던 거죠. 이런 열린 분위기 속에서 부모가 뜻만 있다면 사생아 자식도 얼마든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가정에서 지위는 아마 모호했겠죠. 집에는 아빠뿐만 아니라 요즘 시대에 나오는 재벌 드라마처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의붓어머니’도 계셨을 테니 말이죠. 때문에 교육을 잘 받은 사생아들은 스스로 삶의 길을 개척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길 중의 하나가 예술가였죠! 우리가 잘 아는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린 페트라르카,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 수도사 출신 화가로 보티첼리의 스승인 필리포 리피, 그의 아들 필리피노 레온, 미술에 수학적 원근법을 도입한 회화론의 저술가이자 조각가인 바티스타 알베르티, 말이 필요 없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 모두 사생아 출신으로 위대한 예술가로 역사에 이름을 빡 남겼습니다.
교육의 기회는 사생아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에게 열려있었습니다. 출신이 평범했던 콰트로첸토의 천재 화가 보티첼리도 그리스, 로마 문학과 신화에 학식이 뛰어났죠.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데 메디치가 양자로 삼아 교육을 했습니다. 메디치가에서 운영하는 플라톤 아카데미를 다니게 하여 인문학적 지식을 쌓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자녀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미켈란젤로를 동석시켜 함께 교육을 받게 했죠.
널리 알려진 사실은 르네상스는 메디치가, 스트로치가 등 부유한 상인 가문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놀라운 예술 작품들이 쏟아졌다는 것이죠. 하지만, 돈이 많다고 이렇게 뛰어난 예술 작품이 그냥 나온 것을 아닐 겁니다. 부유했던 베네치아나, 제노바. 밀라노가 아닌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될 수 있었던 건, 인구의 삼분에 일이나 글을 알고 있었고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술가들도 그 대열에 합류해 있었고요. 다 소위 먹물 좀 먹은 사람들이라 이거죠.
또 한 가지는 100개가 넘는 광장에서는 매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토론을 벌일 정도로 지적인 사회였다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피렌체인들이 토론을 자주 벌였다고 했지만, 그건 고상한 표현이고 이 말을 많이 했다는 걸 보면 아마 말싸움에 가까웠을 겁니다. 그 말은 바로 왜?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기존에 방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보면 호기심의 표현이지만, 이 말처럼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말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술가에게는 다릅니다. 이 왜라는 질문 덕분에 그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고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피렌체에서는 조각가, 화가, 세공사, 심지어 지나가던 행인도 길가에 아무 예술가들의 공방에 들러서 작품에 대한 험담에 가까운 말들을 늘어놓고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저 같으면 속으로 ‘자기가 뭘 안다고 떠들어’ 생각하고 속으로만 참고 있다가, 그 손님이 가고 나면 소금 뿌리고 ‘퉤퉤!!’ 침 딱 뱉고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며 잊어버렸겠죠. 하지만 천재는 역시 저와는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위대한 예술가들은 그런 일에 익숙했고 당장은 화를 내고 싸웠을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들은 말에 대해서 찬찬히 분석해서 작품에 반영했죠. 서로에 대한 비판에 거리낌 없었던 르네상스 피렌체의 거리는 고성이 난무했을 테지만, 그만큼 예술에 관한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높고, 어떤 생각도 이야기할 수 있는 열린 세상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전문가들이 모여서 하는 심포지엄이 매일 거리에서 일어났던 거죠. 이러니 예술이 고급스러워지고 혁신적이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피렌체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조각가 도나텔로는 파도바에 초대되어서 가타멜라타 장군상을 제작했습니다. 지금도 명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 덕분에 그는 여기저기 러브콜을 부르는 몸값 높은 작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북부 이탈리아의 부유한 도시국가인 베네치아와 밀라노에서 그를 서로 모셔가려고 안달이었지만, 그는 피렌체로 돌아가 버립니다. 피렌체인들의 험담이 그립다는 이유에서였죠. 천재 조각가 도나텔로에게도 피렌체인들의 비판은 훌륭한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한방울이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