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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ug 29. 2019

조혈모세포 이식 후

무균실 생활과 그 이후

    조혈모세포를 이식하는 과정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했다. 남편과 친정아버지가 나의 두 번째 탄생을 기념하여 대머리인 나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 간호사가 “조혈모세포를 주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중심정맥관에 이미 연결되어 있던 주사 줄에 선홍색 피주머니를 연결하였다. 그 피가 조혈모세포라는 것이다. 아무 느낌이 없었다. 전혀 아프지도 않았다.  피가 다 들어간 후 간호사의 축하를 받으며 골수이식의 의식은 끝났다.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2010년 7월 7일이었다.


    그 후 무균실로 올라가 삼 주를 거기서 지냈다. 18층은 전체 병실이 무균실이었고 간호사실과 복도도 무균상태를 유지했다. 무균실 입원환자를 위한 프로그램인 색종이 접기 수업을 한 번 받은 후에 이식편대 숙주반응이 시작되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온다는 이 반응이 내게는 구토와 복통과 설사로 왔다. 토사곽란이라고 하는 현상과 비슷하였다. 배가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간신히 호출벨을 누르면 간호사가 와서 토하는 걸 도와주었다. 배를 만져주기도 하면서 내 옆에 있어주었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전달되었다.


    골수이식 후의 발작적인 고통은 예견된 것이었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다. 이 고통은 언젠가는 끝난다, 시간아 어서 가라, 하면서 나를 달랬다. 아이를 낳는 것과 비슷한 아픔이 간헐적으로 찾아왔다. 가장 극심한 통증은 일주일 정도 계속되었다. 아파서 많이 울었다. 그다음은 백혈구 수치가 정상화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매일 한 번씩 백혈구 촉진제를 맞았는데 지금까지 맞아 본 주사 중에 제일 아프고 오래 걸리는 주사였다.


    내가 이 시간을 견뎌낸 것은 무엇보다 의료진의 진심 어린 돌봄 덕이었지만, 시어머님과 김기은 사모님의 덕도 컸다. 두 분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전화를 해주셨다. 시어머님은 전화로 기도를 해주셨고 기은 사모님은 찬송가를 불러주셨다. 두 분과의 통화는 나의 힘든 하루에 마침표 역할을 해주었다.

    매일 새벽잠이 깨기도 전에 체온을 측정하고 채혈을 하고 백혈구 촉진제를 맞고 체중을 재고 싱겁기 짝이 없는 아침을 먹고 약을 먹고 화장실에 가서 쏟아내고 침대에 누워 TV 설교를 듣고 점심을 먹고 약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낮잠을 자고 TV 설교를 듣고 저녁을 먹고 약을 먹고 화장실을 가는 것이 입원해 있는 3주 동안의 루틴이었다. 해가 지면 어머님과 기은 사모의 전화를 기다리며 고통스러운 하루를 마감할 준비를 했다.  

     

    무균실에서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죽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그들은 나처럼 자가골수 이식자가 아니라 타인 골수를 공여받은 사람들로 이식편대 숙주반응이 너무 심하여 죽음에 이른 것으로 알고 있다. 자가골수 이식자들에게 병이 재발하면 두 번째 이식은 타인의 골수로 해야 한다. 이식 후 외래를 다니면서 나는 재발 환자들도 많이 만났고 두 번째 골수이식 후 재발한 사람들도 만났다. 나도 언제 재발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 나쁜 놈이 나라고 해서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퇴원 후 재발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는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하기 시작했지만 기분을 너무 우울하게 만들어서 중단하였다. 다행히 자가골수 이식 후 14년 동안 병은 재발하지 않았다. 혈액암은 완치 개념이 없고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다고 하여 2019년까지 6개월마다 검사를 받으러 다녔으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서울 병원으로 가는 것을 중단했다.   


    퇴원 후 친정에서의 2주간은 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지냈다. 의무적으로 먹어야 하는 식사와 몇 걸음의 실내 산책 말고는 나를 침대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낮에는 땅속으로 꺼져 드는 것 같은 저혈압에 시달리고 밤에는 땀과 오한이 번갈아 났다. 옷을 재빨리 갈아입을 만한 기력이 없어서 수건을 옷 속에 둘둘 말고 잤다. 땀이 나면 젖은 수건을 빼버리면 된다. 추워지면 다시 여러 장의 수건을 갑옷처럼 겹쳐 입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도 2주 후에는 상당히 개선되었고 생식을 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져 마침내 대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대상포진으로 인한 흉통을 암의 재발로 오인하여 십년감수하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대상포진은 항암치료와는 또 다른 난적이었다. 면역체계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나에게 이 병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토사곽란은 그래도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대상포진의 통증은 쉬는 시간도 없었다. 환자가 직접 조작하는 진통제 투여는 정해진 시간에만 하도록 권장되어 있어서 나는 문자 그대로 시곗바늘만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끔찍한 열흘이었다. 그 시간 동안에도 나는 마음에 기쁨이 있을 때 고통이 잠시 잊힌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이번에 입원한 것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기은 사모가 아이들을 편에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신기하게도 와 함께 대화를 나눌 때는 고통이 잠시 잊혔다. 그런데 그가 가고 나니 다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음이 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지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렇게 나는 집중적인 치료기를 지나고 2년 후에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안심도 잠시뿐, 우울증이라는 복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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