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라 May 27. 2024

우울증이라는 터널

    나의 우울증은 덕명동으로 이사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몸이 웬만큼 회복되었지만 전혀 생산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유발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후에 M 교수의 말을 들으니 골수이식 후 만 2년이 되던 시점에 끊었던 신경안정제와 관련이 있었다. 복용 약에 대한 설명은 처방전에 따 쓰여 있었건만 내가 제대로 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동안 신경안정제가 나의 마음을 지켜주고 있었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몰랐던 거다.  

    이식 후 만 2년이라는 기간이 중요한 이유는 그 사이에 재발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즉 2년이 지난 후에는 재발률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그 운 좋은 사람들 중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알 방도가 없고,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재발률은 0이 될 수 없었으므로 병원에서는 2년이 될 때까지는 그 사실을 강조하지 않았던 것 같다. 2010년 7월에 이식을 했으므로 2012년 7월에 이식 후 2년이 되었다며 M 교수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삼수를 해서 원하는 대학에 붙은 사람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5년까지는 고형암도 완치 판정을 내리지 않지만, 혈액암은 10년이 지나도 완치개념이 없다. 그 말은 10년 후에도 재발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는 뜻이다. 


    병에 대해 현실적인 관점을 취하기 위해서는 나의 현재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이 우선이다. 지나친 비관도 섣부른 낙관도 금불이다. 비관하게 되면 앞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인생의 즐거움을 놓치게 될 것이며, 근거 없이 낙관하다가 재발했을 때의 실망은 첫 번째 진단받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나는 가장 위험한 2년을 잘 지녀왔으니 앞으로 5년, 10년도 잘 통과하리라는 희망을 우선 장착했다. 재발을 방지하는 비결 같은 건 없는 것 같았으므로 나는 병원에서 요구하는 외래진료 시간을 잘 지켜서 혹시라도 재발 기미가 보일 때 일찍 발견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초전박살은 병과의 전쟁에서도 진리라고 믿었다. 

    확진 후 5년은 국가의 암 환자 지원 정책 덕에 나는 진료비의 5%만 부담하면 되었다. 국가가 나를 걱정해준다는 느낌은 길고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데 힘이 되었다. 2년 동안은 2주 간격으로, 그 후에는 4주 간격으로 병원에 가다가 점차 간격은 2개월, 3개월, 6개월로 벌어졌다.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께 보고 드려야 했다. 부모님들의 안도하는 목소리를 듣고 나면 나의 일상이 재개되었다.  

    골수이식 후 3년 만에 이사한 우리 아파트는 걸어서 20분 거리에 계룡산 국립공원의 한자락인 수통골이 있어서 산책을 자주 했고, 산책로 부근 맛집에 다니면서 기분전환을 했다. 그렇게 하여 몸은 확연히 좋아졌으나 마음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썼듯 신경안정제 성분이 사라진 영향이었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서 다소 벗어나자 다른 종류의 불안이 엄습했다.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당시까지도 나는 내 손으로 가사 일을 하지 못하여 가사도우미를 쓰고 있었다. 밥은 아침만 근근이 차려 먹었고 나머지 끼니는 남이 차려주는 밥을 먹거나 외식으로 해결했다.   

    주부로서 빵점이라는 자괴감보다 더 나를 비참하게 한 것은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확진 후 1년 동안 한 줄도 못 읽었던 것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책을 읽으면 급속히 피곤해져서 한 번에 몇 페이지를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접하는 매체는 TV와 라디오가 전부였다. 

    TV로는 불행한 사람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주로 보았다.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그리고 불면증이 디폴트였으므로 밤새 설교 방송을 틀어놓았다. 깨어 있을 땐 설교를 들어서 좋고 잠들면 잠을 자서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눈을 뜨자마자 ‘죽고 싶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졌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막내였다.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기에 딸 앞에서는 기분이 괜찮은 척 연기를 했다. 그러나 연기는 몇십 분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받았다. 1년 동안 매주 상담을 받았다. 그리고 침묵 기도를 시작했다. 오랜 지인이 침묵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당시의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기에 기도학교에 등록하고, 워크숍에 참여하고 그룹 기도 모임에 나갔다. 상담과 침묵 기도 이야기는 다른 꼭지에 쓸 것이다.

    상담과 침묵 기도의 도움으로 나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점차 벗어났다. 우울증은 우울감이 부정적 사고를 낳고 부정적 사고가 다시 우울감을 낳는 악순환이다. 우울감이 밀려올 때는 늪에 빠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언제 그 늪에서 빠져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티비에서 개그를 보고 웃어도 10초 후에는 다시 우울해진다. 

내가 우울기를 거치는 동안 남편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우울기를 거치는 동안 남편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의 시간 동안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아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자신은 물론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얼마나 암담했겠는가.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내 앞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의 두려움을 억눌렀겠는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편은 나의 투병이 11년째 접어들던 해에 관상동맥 스탠트 시술을 받았다. 큰아주버님이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신 후 심장에 대해 늘 관리해왔던 남편은 별다른 증상이 없어도 매년 건강검진을 받았고, 그해에는 정밀검사를 받았던 것이다. 덕분에 위험할 수 있었던 시기를 헤쳐 나왔다. 큰아주버님은 내가 C 병원에서 확진 받던 날 동행해주신 바로 그분이었다. 아주버님이 선례가 되어주신 바람에 시댁의 남은 형제들은 각별히 심장에 신경을 많이 썼다. 새삼스레 아주버님에 대한 감사가 우러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질병의 유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