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울증은 덕명동으로 이사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몸은 웬만큼 회복되었지만 생산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후에 민교수의 말을 들으니 우울증상은 골수이식 후 만 2년이 되던 시점에 끊었던 신경안정제와 관련이 있었다. 그동안 신경안정제가 나의 마음을 지켜주고 있었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몰랐던 거다.
이식 후 만 2년이라는 기간이 중요한 이유는 그 사이에 재발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2012년 7월에 외래진료를 받으러 가니 이식 후 2년이 되었다며 민교수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이제부턴 재발률이 뚝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봤자 비율이 그렇다는 것이지만 나는 삼수를 해서 원하는 대학에 붙은 사람처럼 기분이 들떴다.
병에 대해 현실적인 관점을 취하기 위해서는 나의 현재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이 우선이다. 지나친 비관도 섣부른 낙관도 금물이다. 비관하게 되면 앞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인생의 즐거움을 놓치게 될 것이며, 근거 없이 낙관하다가 재발했을 때의 실망은 첫 번째 진단받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고형암은 치료 후 5년까지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 판정을 내리지만, 혈액암은 10년이 지나도 완치개념이 없다. 그 말은 10년 후에도 재발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가장 위험한 2년을 잘 지녀왔으니 앞으로 5년, 10년도 잘 통과하리라는 희망을 우선 장착했다. 재발을 방지하는 비결 같은 건 없는 것 같았으므로 나는 병원에서 요구하는 외래진료 시간을 잘 지켜서 혹시라도 재발 기미가 보일 때 일찍 발견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초전박살은 병과의 전쟁에서도 진리라고 믿었다.
확진 후 5년간은 국가의 암 환자 지원 정책 덕에 나는 진료비의 5%만 부담하면 되었다. 국가가 나를 걱정해 준다는 느낌은 길고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데 힘이 되었다. 2년 동안은 2주 간격으로, 그 후에는 4주 간격으로 병원에 가다가 점차 내원 간격은 2개월, 3개월, 6개월로 벌어졌다.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께 보고 드려야 했다. 부모님들의 안도하는 목소리를 듣고 나면 나의 일상이 재개되었다.
골수이식 후 3년 만에 이사한 새 아파트는 걸어서 20분 거리에 계룡산 국립공원의 한 자락인 수통골이 있어서 산책을 자주 했고, 산책로 부근 맛집에 다니면서 기분전환을 했다. 그렇게 하여 몸은 확연히 좋아졌으나 마음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썼듯 신경안정제 성분이 사라진 탓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죽음의 공포에서 다소 벗어나자 다른 종류의 불안이 엄습하는가 싶었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도 나는 내 손으로 집안일을 하지 못하여 가사도우미를 쓰고 있었다. 밥은 아침만 근근이 차려 먹었고 나머지 끼니는 남이 차려주는 밥을 먹거나 외식으로 해결했다.
주부로서 빵점이라는 자괴감보다 더 나를 비참하게 한 것은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확진 후 1년 동안 한 줄도 못 읽었던 것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책을 읽으면 급속히 피곤해져서 한 번에 몇 페이지를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접하는 매체는 TV와 라디오가 전부였다. TV로는 불행한 사람들이 나오는 프로그램만 눈에 들어왔다.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별로 와닿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눈을 뜨자마자 ‘죽고 싶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졌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막내였다.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기에 딸 앞에서는 기분이 괜찮은 척 연기를 했다. 그러나 연기는 몇십 분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상담에 가기 싫은 날이 더 많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야 되겠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차를 운전하고 갔다. 침묵기도도 시작했다. 기도학교에 등록하고, 워크숍에 참여하고 그룹 기도 모임에 나갔다. 상담은 1년 후 종료했지만 침묵기도는 지금까지 하고 있다.
상담과 침묵 기도의 도움으로 나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점차 벗어났다. 부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자 기분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우울증은 우울감이 부정적 사고를 낳고 부정적 사고가 다시 우울감을 낳는 악순환이다. 우울감이 밀려올 때는 늪에 빠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언제 그 늪에서 빠져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TV에서 개그 프로를 보고 웃어도 10초 후에는 다시 우울해진다.
내가 우울기를 거치는 동안 남편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우울기를 거치는 동안 남편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의 시간 동안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아내가 조만간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자신은 물론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얼마나 암담했겠는가.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내 앞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의 두려움을 억눌렀겠는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편은 내가 확진 받은 지 11년째 되던 해에 관상동맥 스탠트 시술을 받았다. 큰아주버님이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신 후 심장에 대해 늘 관리해 왔던 남편은 별다른 증상이 없어도 매년 건강검진을 받았고, 그해에는 정밀검사를 받았던 것이다.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큰아주버님은 내가 충남대학병원에서 확진받던 날 동행해신 분이다. 아주버님이 선례가 되어주신 덕에 시댁의 남은 형제들은 각별히 심장에 신경을 많이 쓴다. 온유하셨던 아주버님이 그립다.
정신적으로는 이 시기가 골수종 치료기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하지만 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나니 나에게는 고통 속에 감추어진 성장의 기회와 슬픔 속에 감추어진 기쁨의 씨앗이 전보다 훨씬 잘 보이게 되었다. 나는 정말로 새사람이 되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전보다는 확실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