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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ug 29. 2019

혈액암, 그 이후

난치병의 경험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암병동 복도를 지나 교수 연구실까지 걸어가면서 보니 환자들이 죄다 스님들처럼 까까머리였다. 참으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현대적인 시설의 대학병원 로비에는 안락한 의자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는데 불과 몇 층 위에는 수도승 같은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다. 이 사람들과 나는 어떤 관계일까?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담당교수였다. 그는 사형선고를 처음 내려 보는 판사처럼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냉정하게 보이지도 않고 감상적이 되지도 않으려 애쓰는 그의 노력이 측은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간 나의 일행은 그의 태도를 보고 내 병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된 그의 설명은 충격적이라기보다는 다소 지루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인간적인 모습이었는데 그 순간에는 이런 일을 많이 해보지 않은 사람의 서투름만이 느껴졌다. 그다음부터 일어난 일들은 내 이해의 속도보다 훨씬 빨리 진행되었다. 다발성골수종의 진단, 치료병원을 정하기 위한 논의, 서울성모병원으로의 이관, 또 한 번의 골수검사.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담당교수와의 만남.


  서울 병원의 담당교수는 핏기 없는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가 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최고의 병원에서 오랜 교수생활을 한 사람의 오만함은 없었다. 병에 대한 의사의 태도가 환자의 태도를 결정한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이 사람이라면 훌륭한 지휘관이 되어 암과의 전투를 멋지게 치르도록 나를 도와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는 다발성골수종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였다.


  나는 늘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지만 죽음의 두려움이 몰려오는 그 순간에는 나와 마음을 함께하는 존재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나의 가족이 마음을 같이 해주었지만 내편이라고 느껴지는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든든함이었다. 다윗이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썼을 때 그는 전문가보다 월등히 나은 존재인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었던 것 같다.


  대전 병원에서 다발성골수종 진단을 받고 골수검사를 위해 하룻밤을 입원하고 있는데 한밤중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죽음의 과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걸까?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실까? 나는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람들 중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기도로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오늘 혈액암 진단을 받았고 지금 몹시 두렵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간단한 문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고 기도를 약속하였다. 매일 기도하겠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겠다는 답장이 수십 개 왔다.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나의 두려움을 이해해주고 나의 병을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로 충분히 안심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문을 보내주기도 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내 병의 의미에 대해 성찰할 수 있도록 좋은 글귀들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천군만마가 나를 두르고 있는 느낌이 이런 것이리라.    


  지인들의 기도 약속을 받고 나니 두려움은 씻은 듯 사라졌고 서울 병원 담당 교수를 만나고 나니 용감한 전사처럼 전투에 임할 준비가 되었다. 전투의 첫 단계는 덱사메타손 복용이었다. 이 약은 스테로이드제인데 한 번에 40알씩 하루 세 번 배부르게 먹었다. 부작용으로 고열이 나서 응급실에 몇 번 실려 갔고 20일 동안 입원을 하기도 했다. 그다음 순서로 벨케이드 주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덱사메타손은 가장 전통적인 치료법인데 먼저 그것을 사용해보고 효과가 없을 때 벨케이드를 써야 보험적용이 되었다. 12번의 벨케이드 주사가 끝나고 관해(혈액에서 암세포가 검출되지 않는 상태)가 되면 자가골수이식을 받을 수 있었다. 관해가 안 되면 벨케이드를 4번 더 맞는다. 그래도 안 되면 관해가 될 때까지 맞는다. 다행히 나는 12번 만에 관해가 되었다. 그다음 과정은 골수이식 전 단계로 멜팔란 주사를 맞는 것이다. 이번 약은 벨케이드보다 확실히 더 강력한 것으로 이 주사를 맞으니 머리카락이 점점 빠졌다. 그다음은 골수 채취였다. 등짝에다 드릴로 구멍을 뚫고 주사기로 골수를 빼낸다. 골수 채취는 하도 여러 번 해서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이렇게 채취한 골수를 기계장치에서 고속 회전시키면 조혈모세포가 분리되어 나온다. 이것이 나의 피를 다시 맑게 해 줄 생명수이다.


  조혈모세포를 이식하는 과정은 싱거울 정도로 단순하였다. 남편과 친정아버지가 나의 두 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대머리인 나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 간호사가 “조혈모세포를 주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중심정맥관에 이미 연결되어 있던 주사 줄에 선홍색 피주머니를 연결하였다. 그 피가 조혈모세포라는 것이다. 아무 느낌이 없었다. 전혀 아프지도 않았다.  피가 다 들어간 후 간호사의 축하를 받으며 골수이식의 의식은 끝났다.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2010년 7월 7일이었다.


  그 후 한 달은 무균실에서 지냈다. 18층은 모든 병실이 무균실이었고 간호사실과 복도도 무균상태를 유지했다. 색종이 접기 수업을 한 번 받은 후 이식편대 숙주반응이 시작되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온다는 이 반응이 내게는 구토와 복통과 설사로 왔다. 토사 란이라고 하는  현상과 비슷하였다. 배가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간신히 호출벨을 누르면 간호사가 와서 토하는 걸 도와주었다. 배를 만져주기도 하면서 내 옆에 있어주었다. 이 병원 무균실의 간호사들은 전국에서 가장 친절하다.


  골수이식 후의 발작적인 고통은 예견된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놀라지는 않았다. 이 고통은 언젠가는 끝난다. 시간아 어서 가라. 아이를 낳는 것과 비슷한 아픔이 간헐적으로 찾아왔다. 가장 극심한 통증은 일주일 정도 계속되었다. 아파서 많이 울었다. 그다음은 백혈구 수치가 정상화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매일 한 번씩 백혈구 촉진제를 맞았는데 지금까지 맞아 본 주사 중에 제일 아프고 오래 걸리는 주사였다.

 

  나는 이 과정을 다 이겨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참 기특하다. 무균실에서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죽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그들은 나처럼 자가골수 이식자가 아니라 타인 골수를 공여받은 사람들인데 이식편대 숙주반응이 너무 심하여 죽음에 이른 것으로 알고 있다. 자가골수 이식자들에게 병이 재발하면 두 번째 이식은 타인의 골수로 해야 한다. 이식 후 외래를 다니면서 나는 재발 환자들도 많이 만났고 두 번째 골수이식 후 재발한 사람들도 만났다. 나도 언제 재발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 나쁜 놈이 나라고 해서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재발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는 탈리도마이드라는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기분을 너무 우울하게 만들어서 중단하였다. 그 후 9년 동안 병은 재발하지 않았다. 혈액암은 완치 개념이 없고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다고 하여 지금도 6개월에 한 번 검사를 받으러 간다. 나의 케이스는 담당교수의 임상연구에서 자가골수이식 후 생존율을 높이는 데 꾸준히 기여하고 있다.  


  퇴원 후 친정에서의 2주간은 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지냈다. 의무적으로 먹어야 하는 식사와 몇 걸음의 실내 산책 말고는 나를 침대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낮에는 땅속으로 꺼져 드는 것 같은 저혈압에 시달리고 밤에는 땀과 오한이 번갈아 났다. 옷을 재빨리 갈아입을 만한 기력이 없어서 수건을 옷 속에 둘둘 말고 잤다. 땀이 나면 젖은 수건을 빼버리면 된다. 추워지면 다시 여러 장의 수건을 갑옷처럼 겹쳐 입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도 2주 후에는 상당히 개선되었고 생식을 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져 마침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대상포진으로 인한 흉통을 암의 재발로 오인하여 십년감수하는 등 사건이 있었다. 대상포진은 항암치료와는 또 다른 난적이었다. 면역체계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나에게 이 병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토사 란은 그래도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대상포진의 통증은 쉬는 시간도 없었다. 환자가 직접 조작하는 진통제 투여는 정해진 시간에만 하도록 권장되어 있어서 나는 문자 그대로 시곗바늘만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끔찍한 열흘이었다. 그 시간 동안에도 나는 마음에 기쁨이 있을 때 고통이 잠시 잊힌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이번에 입원한 것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아이들을 통해 소식을 듣게 된  친구가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 만나 삼십 년 가까이 알고 지내는 친구였다. 와 함께 대화를 나눌 때는 고통이 훨씬 덜하였다. 그런데 그가 가고 나니 다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음이 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지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직접 체험해보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렇게 나는 길고 긴 병과의 싸움을 싸우고 2년 후에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재발하는 케이스 중 대부분이 이식 후 2년 안에 재발하기 때문이다. 그 후 나에게는 우울증이라는 복병이 찾아왔지만 나는 또다시 이겨냈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린 2년여의 시간은 나를 내적으로 크게 성장시켰다. 이 터널을 통과하고 나니 나에게는 고통 속에 감추어진 성장의 기회와 슬픔 속에 감추어진 기쁨의 씨앗이 전보다 훨씬 잘 보인다. 나는 정말로 새사람이 되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전보다는 확실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음을 느낀다. 이는 순전히 내 옆에서 힘이 되어준 많은 사람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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