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내 주변에는 내게 고민 상담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내가 비교적 그들보다 평탄한 인생을 살아와서인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스스로 생각할 때 나는 ‘공감’과 ‘위로’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상대에게 공감하고 위로하는 방식은 그의 상황과 가장 비슷한 나의 경험, 혹은 주변 사람의 경험에 빗대어 조언하거나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간혹 나의 경험과 내 주변 어디에도 드문 고민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그저 가만히 상대의 말을 들어 주고 최대한 그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나라면 어땠을지를 상상하며 친구가 나에게 투자한 그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성심성의껏 공감하려 애를 쓴다.
작년에 듣게 된 워크숍에서 자료로 접한 조은별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던 건,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에 살고 계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감히 내가 공감과 위로를 건넬 입장은 아니었지만, 되레 내가 그분에게 위로를 받을 것만 같은 약간의 기대가 있어 그녀를 섭외했다. 약속 시간에 나보다 먼저 도착해 계셨던 조은별 선생님은 나의 예상처럼 뜨거운 삶을 살고 있었고, 인터뷰가 끝나고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은 새롭게 취직하여 청년 인턴이자 장애 직장인, 워킹맘의 인생을 걷고 있다. 아무도 겪고 싶지 않은 사건을 경험한 후 인생 2막을 씩씩하게 걸으며 이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성숙한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새롭게 해 나갈 수 있는 의지와 태도를 배웠다.
최경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조은별 안녕하세요. ‘명랑스트로커 굿스타’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은별입니다. 30대 뇌출혈 환자이면서 6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최경아 작년에 듣게 된 워크숍에서 만난 아티스트 듀오 라움콘의 송스날 선생님의 프로젝트 자료를 통해 조은별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인터뷰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해요. 명랑스트로커 굿스타라는 닉네임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요?
조은별 블로그에서나 대외적으로 활동할 때 이 닉네임을 주로 쓰는데요. 뇌졸중 환자라는 표현을 쓰기 싫었어요. 미국에서는 뇌졸중 환자를 ‘스트로커’라고 부르거든요. 우리나라식으로 하면 ‘뇌졸중러’와 같은 표현인 거죠. 뇌졸중 환자가 아니라, 그냥 뇌졸중에 걸린 사람이라는 뜻으로, 처음엔 ‘뇌졸중러’라고 쓰다가 뇌졸중을 미화시키는 것 같아서 영어식 표현인 스트로커를 쓰게 됐고요. 제가 명랑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명랑, 그리고 제 이름인 조은별을 영어로 직역해서 굿스타를 붙였습니다. (웃음)
최경아 뇌졸중 발병 전과 후의 삶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요. 가장 크게 변한 것과 힘든 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조은별 발병 전에는 정말 평범한 직장인이었어요. 대학교도 수월하게 간 편이고, 취직도, 결혼도, 출산도 막힘없이 했어요. 요즘 힘들다고 하는 것들을 어찌 보면 쉽게 한 거죠. 다른 스트로커도 그렇겠지만, 뇌졸중이 발병한 뒤로 잃은 것이 너무 많다고 느껴졌어요. 직장에서 입지도 적어졌고,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것도 많이 없어졌고요. 평범하게 하던 것을 못 하게 되니까 처음엔 그게 제일 힘들었죠. 지금은 나아져서 새로운 삶에 적응해 잘 사는 중이에요.
최경아 발병 전에는 직업이 뭐였나요?
조은별 은행원이었어요. 실적도 좋았고, 제가 성격도 밝은 편이고 뭐든 적극적으로 하는 성향이라 예쁨도 많이 받고 인정도 받았어요. 그런데 발병 후에 휴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저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잊혀 갔고, 복직 후에는 아무래도 이전처럼 일을 할 수 없으니 누군가가 도와줘야 했거든요. 그래서 약간은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죠. 아무래도 왼쪽 신체가 마비된 상태니까 1/2만 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대우도 1/2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경아 그전에는 촉망받는 직원이었는데, 그만큼 역량 발휘를 하지 못하니 힘들었겠어요.
조은별 은행은 순환근무라서 지점이 바뀔 때마다 근무하는 직원이 계속 달라지거든요. 그래서 함께 일했던 동료, 선배들이 멀리 떨어진 시선에서 절 보게 됐어요. 그분들은 원래의 저를 잘 아시니까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해 보라고 응원을 많이 해줬어요.
최경아 그럼 발병 이후에 새롭게 만난 직원들은 어땠나요?
조은별 대부분 안쓰럽게 바라봤죠. 그런데 한번은 역차별을 당한다고 컴플레인을 한 직원도 있었어요.
최경아 역차별이요?
조은별 네. 팀장님이 제가 하기 어려운 업무는 빼주셨거든요. 예를 들면 돈 세는 일 같은 거요. 그걸 역차별이라고 생각하는 직원이 있기도 했어요.
최경아 발병 원인은 무엇이었나요?
조은별 병명은 혈관 기형이에요. 뇌동정맥 기형에 의한 뇌출혈이 정식 병명인데요. 이 혈관 기형이 살면서 터지는 사람도 있고, 안 터지는 사람도 있어요. 현대 의학으로도 그건 아직 알 수가 없다고 해요. 이 기형 혈관 자체도 태어날 때부터 있었는지, 살다가 생긴 건지도 모르고요. 저의 경우, 출산 후에 모유 수유하느라 잠을 거의 못 자서 과로로 코피가 터지고 끝났을 것을, 더 약한 혈관이 뇌에 있어서 터졌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에요. 너무 제 몸을 혹사하며 살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최경아 감히 상상도 안 되는 일을 경험하신 건데요. 아직 아기가 6개월이었을 때인데 너무 힘드셨겠어요. 운영하시는 블로그에서 좀 살펴봤는데, 기저귀 가는 것도, 옷 갈아입히는 것도 잘 안되니까 주저앉아 우는 경우가 많았다고요. 그런 좌절감이나 우울감이 왔을 때 어떻게 하셨나요?
조은별 감사하게도 양가 어머님들께서 육아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제가 퇴원하니까 아이가 세 살이더라고요. (웃음) 그쯤 되면 제 손을 그나마 덜 타니까 괜찮았어요. 제가 100% 육아에 전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좌절감이 컸을 텐데,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최경아 육아에 도움을 많이 받아서 다행인 것도 있었겠지만, 아기가 엄마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것 같기도 한데요. 어땠나요?
조은별 아이한테 저는 그냥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 엄마로 불리는 존재였어요. 집에서 제가 하는 건 그저 놀아주는 거 정도였거든요. 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씻기거나 옷을 입혀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오랜만에 만난, 잘 놀아주는 이모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러니까 무슨 큰일이 있어도 엄마를 안 찾더라고요. ‘엄마’라는 역할로 제가 인정받기까지 좀 오래 걸렸어요. 지금은 아이랑 많이 부딪치면서 훈육도 하고, 점점 엄마로 인정을 받고 있어요.
최경아 아기가 다섯 살이 돼서야 좀 친해지신 거군요.
조은별 네. 이제 좀 친해져서 진짜 엄마가 된 것 같아요.
최경아 선생님은 어릴 때 어떤 사람이었나요?
조은별 작고 마른 아이였는데, 행동이 늘 빠릿빠릿하고 눈치도 빨랐어요. 그래서 선생님들께 예쁨을 많이 받았어요.
최경아 어릴 때는 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크잖아요. 부모님, 선생님의 영향이 가장 큰데, 학교에서 그런 칭찬을 받고 자랐으니 성취욕 때문에라도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해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인이 되어서도 대학교 진학, 취업, 결혼, 출산까지 착실하게 해내신 거 아닐까요? 뇌졸중이라는 갑작스러운 병이 찾아왔을 때도 좌절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결국 또 성실하게 견뎌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워서 지금은 브레인 트레이너로 활동을 하고 계신 거잖아요. 선생님의 성실함은 어디서 영향을 받은 것일까요?
조은별 아무래도 부모님 영향이 크죠. 아버지가 교사로 일하시다 퇴직하셨어요. 30년 동안 같은 일을 오래 해 오신 분인 만큼 일과도 규칙적이고, 무엇보다 학습하는 습관이 몸에 밴 분이세요. 그리고 어머니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분이시라, 가정주부이시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늘 배우세요. 악기, 원예 등등…. 두 분이 늘 무언가를 꾸준히 성실하게 하시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봐 왔으니까 은연중에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최경아 그렇게 착하고 성실한 딸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가족들이 많이 놀라시고 안타까워 하셨겠어요. 그때 가족들은 어떠셨나요?
조은별 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초반에 인지장애가 있어서 대화가 원활히 되지 않고, 저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상태였거든요. 나중에 남편한테 듣기로는 생각보다 어머니가 침착하셨다고 했어요. 엄청나게 놀라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하게 대처하셨다는 말을 듣고 위기에 강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면을 제가 닮은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죠.
최경아 그러면 남편분은 어떠셨어요?
조은별 신랑의 모습도 전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인생의 모든 걸 다 잃은 것 같은 느낌이었대요. 그래서 사실 남편에게는 아직 트라우마가 조금은 남아있어요. 직업이 소방관인데, 제 경우와 비슷한 현장을 나가면 거기서 제 모습이 보이는 거죠. 없던 우울증도 생겼고요. 그래도 제가 좋아질수록 남편도 좋아지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최경아 처음 발병했을 때는 거의 몸 반쪽을 아예 쓸 수 없었다고 하셨는데요. 지금 제가 선생님을 보기에는 왼쪽 다리가 조금 불편한 정도로 보입니다. 어떻게 치료받으신 건가요?
조은별 사실 이 병이 한계도 없고, 방법도 여러 가지이긴 한데요. 저는 재활 운동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좋아질지 모르니 사실 뭐든지 꾸준히 해보는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먼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재활 운동을 꾸준히 했습니다. 그러니까 차츰 좋아지는 게 눈에 띄더라고요.
최경아 그렇게 꾸준히 하다 보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나요?
조은별 그런 경우도 있고, 조금은 장애가 남는 경우도 있어요. 그것도 사람마다 다 달라요.
최경아 선생님의 경우엔 어느 정도로 좋아지셨나요?
조은별 처음 발병했을 때와 비교하자면, 우선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됐고요. 저의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 같은 게 생겼죠. 발병한 직후를 나사가 일곱 개 정도 빠졌던 상태였다고 지인들에게 이야기하거든요. 지금은 그 빠진 나사 일곱 개가 조금은 조여진 상태이고요. (웃음)
최경아 발병 후 대화가 불가능했던 기간이 어느 정도 되었나요?
조은별 그렇게 오래는 아니었어요. 4~5개월?
최경아 조금 회복이 됐다 하더라도 육아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2023년부터는 양가 어머님들 없이 육아하셨다고요?
조은별 네. 퇴사하고 난 이후로 남편이 출근했을 때는 혼자 아이를 돌보고 있어요. 아이 어린이집 끝나면 픽업 가서 저녁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하는 일이요. 그런데 남편이 교대 근무라서 집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은 남편이 해 주죠.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만 혼자 하고 있어요. 어쩌면 남편의 소방관이라는 직업 덕분에 제가 좀 수월해진 셈이죠. (웃음)
최경아 어떻게 보면 인생을 쉴 틈 없이 살아오신 거잖아요. 대학, 취업, 결혼, 출산, 육아까지…. 그렇게 타이트하게 인생의 변화를 기꺼이 수용하며 살아온 이유가 있을까요?
조은별 당연히 계획해서 그렇게 산 건 아니고요. (웃음) 그냥 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온 것 같아요. 취업도 운 좋게 지원한 곳 중 한 곳이 붙어서 다니게 된 거고, 결혼도 그 당시 주변에서 많이 하니까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 같아요. 출산도 계획보단 조금 빨라졌지만 아이가 생겨서 낳게 된 거고요. 인생의 그런 큰 변화들이 딱히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순차적으로 물 흐르듯이 연결됐어요.
최경아 스물일곱 살이라는 조금은 이른 나이에 결혼하신 뒤에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텐데… 그런 것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후회한 적은 없으셨나요?
조은별 오히려 제가 일찍 결혼하고, 출산을 하고 나서 뇌졸중이 발병한 것에 대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더 당황하고 좌절했을 것 같거든요.
최경아 내가 사랑하는 반려인과 아이라는 내 가족이 있으니까, 힘을 내서 더 나아져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긴 거네요.
조은별 그런 것도 그렇고, 만약 친구들 모두 결혼해서 아기 낳고 잘 살고 있는데 저 혼자 결혼도 안 하고 있다가 뇌졸중까지 발병했다면 그 열등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최경아 진짜요? 대한민국 사회가 남들의 눈치나 비교를 통해 내 삶의 가치를 결정짓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요즘은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성이라면 그런 경우가 더 많고요.
조은별 대한민국 사회가 여성에게 할 일을 너무 많이 주는 것 같아요. 30대 초반이라는 어린 나이에 누군가의 딸, 엄마, 며느리, 아내이자 동시에 은행원이기도 한 여러 역할을 소화하기에 버거워서 발병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더라고요.
최경아 그 여러 역할을 모두 잘 해내려고 하다 보니 그러셨을지도요. 조금 가벼운 질문으로 넘어가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란에 대한 질문을 드릴게요. 계란으로 주로 어떤 요리를 해 드시나요?
조은별 아이가 한 때 치즈계란말이를 좋아해서 그걸 자주 먹다가, 최근에는 정기 배송으로 받고 있는 유정란으로 삶은 계란이나 구운 계란을 해 먹어요. 계란 요리는 비교적 빨리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제가 해 줄 수 있으니까 너무 좋죠.
최경아 발병 전의 자신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조은별 너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늘 역할로서의 나를 신경 쓰며 살았던 것 같거든요. 딸, 아내, 엄마, 은행원이라는 역할이요. 그게 저를 위한 시간이라고 착각했던 거죠.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는 온전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없었어요. 나의 몸과 마음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는 일이요.
최경아 뇌졸중 발병 후에야 비로소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갖게 된 거군요.
조은별 네. 지금은 이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제 위주로 살고 있어요. (웃음) 가족들도 그렇게 맞춰주는 편이고요.
최경아 일과가 어떻게 되나요?
조은별 아이 유치원 보내고, 헬스장 가서 운동하고, 블로그, 유튜브 작업, 강의 준비하는 정도예요. 특별한 건 없네요. (웃음)
최경아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시는데, 특별한 게 없다니요. 발병 전의 몸 상태로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요?
조은별 아이랑 달리는 거요. 제가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잘했거든요. 남편도 달리기를 잘하고요. 그래서인지 저희 아이도 잘 뛰는 편인데요. 어느 날 아이와 놀이터에 갔는데, 다른 아이가 엄마랑 달리기 시합을 하며 놀고 있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던 제 아들이 조심스럽게 저에게 물어보더라고요. “엄마도… 뛸 수 있어?”라고요. 그 친구를 부러워하는 듯이.
최경아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조은별 “지금은 못 뛰지. 근데 옛날엔 엄마도 잘 뛰었어”라고 했죠. 그런데 아이가 안 믿는 거예요. 아무래도 아이의 기억 속 엄마는 늘 이 모습이었으니까요. 아이한테 그게 제일 미안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아지면 꼭 아이와 함께 뛰고 싶어요. 이런 일 때문에 재활의 의지가 더 생기기도 했고요.
최경아 지금은 아이와 많이 가까워졌다고 하셨잖아요. 아이는 엄마의 병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나요?
조은별 아이가 올해 여섯 살이 됐거든요. 어느 정도 컸다고 생각해서 설명해 줬어요. 엄마가 뇌를 다쳐서 아픈 거라고요. 작년까지만 해도 손과 다리가 아픈 줄로 알고 있었는데, ‘뇌’라는 기관에 대해 아이가 알게 되면서 “엄마 뇌가 고장 나서 여기가 안 움직이는 거잖아~”라고 말해요. 신생아 때 제가 아이를 씻겨 주는 영상이 있어서 가끔 보여주는데, 아이가 아직도 그게 저라고 믿지 않아요. “(영상 속) 이 손은 움직이잖아~” 하면서요.
최경아 그럴 땐 조금 속상하기도 하겠어요. 요즘은 아이랑 주로 뭘 하고 놀아주시나요?
조은별 요새는 제가 기동력이 좀 좋아져서 놀이터에서 조금 뛰기도 해요. 아이가 많이 봐주긴 하지만요. (웃음) 예전에는 아이 안전 문제 때문에 남편이 저랑 아이랑 단둘이 있는 걸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이가 좀 크기도 했고, 저도 좋아져서 허락해 줬죠. 처음에는 늘 어머니나 남편이 항상 함께했어요. 아이도 아이지만, 저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상황이 저에게는 은근히 스트레스더라고요. 병원에 있는 동안 계속 붙어 있었는데, 퇴원해서까지 매시간 같이 있으니 힘들더라고요. (웃음)
최경아 보호자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 있겠죠. 그럼 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진 거잖아요. 좋은 점이 있다면?
조은별 나에 대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아요.
최경아 주로 무슨 생각을 하세요?
조은별 앞으로 뭘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뭐 그런 생각들이요. 저는 돈도 돈이지만 유명해지고 싶어요. 뇌졸중 환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게 제 목표예요.
최경아 그런 목표 때문에 블로그도 유튜브도 하고 계시는 거군요. 그런 플랫폼을 통해서 섭외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나요?
조은별 네. 가끔 있어요. 섭외라기보다 온라인상에서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시죠. 그런데 자신과 저를 비교하기 위한 수단으로 질문만 할 때가 많아요. 예를 들면 어떤 걸 해서 좋아졌는지가 아니라, 언제부터 그렇게 됐냐는 ‘결론 지향적’인 질문들이요. 자신의 상태를 가늠하고 비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저를 바라보더라고요. ‘저 사람은 발병 후 저 때쯤부터 좋아졌는데 나는 더 빠르니까 더 많이 좋아지겠다’ 같은 이상한 비교와 희망 같은 걸 원하는 것 같았어요. 사실 환자마다 양상이나 속도가 다 달라서 그걸 그렇게 비교할 게 아닌데도요.
최경아 아…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한다는 게 안타깝네요. 저도 예전에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데, 우울감을 느끼는 비장애인들이 장애인과의 비교를 통해 그래도 내가 낫다고 생각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기는 잘 살고 있다고 위안한다고 하더라고요. 의외로 많은 사람이 내가 어떻게 나아질지 고민하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비교함으로써 나를 판단하는 이상한 습성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학창 시절에 주입식으로 교육받고 자라면서 늘 경쟁을 의식하게 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조은별 저도 비슷한 걸 느끼는데요. 외국 스트로커들과도 SNS로 교류하는데, 그들은 잘하고 있다, 응원한다는 식의 표현을 주로 하는데, 우리나라 환자들은 기능과 외형적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써요. 손과 발은 어디까지 움직이냐, 지팡이 짚고 다니냐는 식의 질문들…. 환자뿐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들도 그런 것 위주로만 물어보세요. 사실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더 나은 환자와 비교하면서 부러워하기도 했으니까요.
최경아 아무래도 살아온 환경이나 문화의 차이가 있으니까 외국 환자의 표현 방식과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조은별 제가 운 좋게 한국인 스트로커로서 참여한 책이 있거든요. 전 세계 26명의 젊은 스트로커들의 이야기를 담은 컴필레이션 책인데 그걸 보고 외국 분들이 간혹 연락을 주시기도 하시거든요. 그럴 때마다 많이 느끼죠, 문화 차이를.
최경아 그 프로젝트는 어떻게 참여하시게 됐나요?
조은별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보게 됐어요. 전 세계의 젊은 스트로커 중에 발병 후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지원해서 참여하게 됐어요. 『 Finding Yourself After Stroke 』라는 제목의 책으로 2022년에 호주에서 출판이 됐고, 아마존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최경아 모집했던 분도 스트로커이셨나요?
조은별 네. 두 아들의 엄마인 호주인 환자였어요. 질문지를 보내주셨고, 제가 거기에 답변해서 보내 드린 걸 편집해서 책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그걸 한국어판으로 만들기 위한 번역 작업을 요즘 하고 있어요.
최경아 선생님께서 직접요?
조은별 네.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는데 호주 출판사에서 제가 번역을 하면 출판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하고 싶어서 무료로 하겠다고 했어요. 만약 이 책이 실제로 한국에서 출판이 되면 반응을 좀 봐서 한국인 스트로커만 모아 이런 컴필레이션 책을 내보고 싶기도 해요. 왜냐하면 아무래도 외국의 병원 환경이나 치료 시스템, 추후 복지 등에서 우리나라와 다른 부분이 많거든요. 그러니 아무래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 공감을 못 하겠죠.
최경아 그렇겠네요. 어떤 부분이 다른가요?
조은별 미국이나 호주의 경우에는 보통 3~6개월 후에 퇴원해요. 외부에서도 치료를 받기 어렵지 않고 장애인을 위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으니까요. 반면, 우리나라는 건강보험 적용이 2년까지만 되거든요. 그래서 2년 이후에는 보험공단에서 병원에 돈이 안 내려오니까 환자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환자들이 2년 이후에는 요양 재활병원으로 많이 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장애가 남으면 일상생활을 하기가 어려우니까 어떻게든 어떤 병원에라도 붙어 있으려고 해요.
최경아 그걸 환자들이 다 알고 있다면 2년 안에 상태가 나아지길 노력하면서 생활하겠네요.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병원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려울 수 있으니까요. 선생님과 이렇게 대화하면서 느끼는 건데, 발병을 계기로 스스로를 아끼며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기신 것 같아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꿈 같은 게 있을까요?
조은별 2022년, 라움콘이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은 ‘다이아 프로젝트’를 통해 젊은 뇌출혈 환자 5인이 모여 장애에 관한 다양한 예술적 표현을 경험했는데요. 그 이후로 이런 예술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뇌졸중 환자들을 위한 예술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해 보고 싶어요. 아무래도 질환을 앓고 있는 당사자가 기획하면 좀 더 새로운 프로젝트가 탄생하지 않을까요? (웃음)
최경아 모범생답게 자기 질환에 대해서 계속 연구하고 알리고자 하는 의지가 보입니다.
조은별 네. 꼭 뇌출혈 환자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경각심을 주고 싶어요. 제가 회사 다닐 때, 야근이나 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얼마나 뇌에 해로운지 잘 몰랐거든요. 그래서 뇌를 해치는 습관이나 생활 패턴 같은 것을 알려서 많은 분이 뇌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되면 좋겠어요.
최경아 저부터 좀 알아야겠네요. 뇌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조은별 규칙적인 운동과 수면, 적당한 건강식, 명상? 별거 없어요.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몸에 안 좋은 건 특히 뇌에 안 좋다고 보면 되는데요. 아무래도 요즘은 가공식품이나 합성 첨가물 등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과한 인공 화합물들이 생체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거죠. 인공적인 것들, 특히 가공식품이나 각종 첨가제가 뇌를 해치고 몸을 고장내듯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 꼭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확실히 옛날보다 아픈 사람도 많고 각종 질병들도 많잖아요. 동물이나 식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래서 발병 후에는 최대한 인공적인 것을 지양하고 있는데, 앞서 유정란을 배송받아 먹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유정란을 먹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그거 아세요? 유정란 노른자는 주황에 가까운 아주 진한 노란색이에요. 닭장에 갇혀서 기계적으로 낳은 무정란의 연한 노란색 노른자를 보면 가끔은 기분이 나빠지기까지 하더라고요. 그만큼 자연적인 것은 인공적인 것과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동물도, 사람도, 세상도, 자연에 가깝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뇌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어요.
최경아 18세기 프랑스 미식가 브리야-사바랭(Brillat-Savarin)의 격언 “Tell me what you eat and I’ll tell you who you are”에서 비롯된 “당신이 먹는 음식이 곧 당신이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확실히 건강한 식습관을 가진 사람 중에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그것과 함께 또 중요한 건 스트레스 관리죠. 저 같은 프리랜서는 그래도 남들 일할 때 놀고, 남들 놀 때 일하면 되니까 아무래도 사람 없을 때 쉬고, 사람 많을 때 안 나가면 ‘사람’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는 덜하거든요. 사실 제가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게, 왜 대부분의 직장인들 휴가일이 비슷한 건가요? 안 그래도 사람에 치여 매일매일 출퇴근하고 일하는데, 휴가까지 사람 많고 가장 비쌀 때 가서 어떻게 쉬겠다는 건지…. 저는 그 누구보다도 K-직장인들을 가장 안쓰러워 하면서도 존경합니다. 그 빡빡한 세계에서 살아남아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어 가고 계시는 거잖아요. 어디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늘 같은 말 하잖아요. 술 줄이세요,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예전엔 ‘또 똑같은 말이네.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하고 생각했는데요, 이젠 그게 정말 정답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일과 사람에게서 오는 스트레스가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게 만들더라고요.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조은별 그렇죠. 나를 아끼는 방법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나를 잘 들여다보고, 위로하고, 해소하는 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 방법을 잘 모르는 게 사실이죠. 일하다 보면 그런 생각할 여유가 없기도 하고요.
최경아 저도 사실 힘든 시절을 겪으면서 알게 된 것 같아요,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조은별 저도 뇌출혈 발병하고 안 거잖아요. 그런 시기가 있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최경아 저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아무 생각 안 하고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거나, 격한 운동을 해서 땀을 쏟거나, 아니면 그냥 자는 거예요. 그게 가장 개운해지는 방법인 것 같더라고요. 선생님께서는 어떤가요?
조은별 자기 전에 명상하는 것이 가장 익숙하고 편한 방법인 것 같아요. 요즘은 거의 루틴처럼 늘 하고 있습니다.
최경아 내가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나요?
조은별 발병 후에 알게 된 것인데요. 다른 사람들은 힘들다고 하는 것을 저는 별로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이 다른 점인 것 같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예민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도 힘든 일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둔감하게 느끼고 처리하는 게 제 강점이자 특이점이라고 생각해요. 그 덕분에 이 병을 잘 견딜 수 있었던 것 같고요. 물론 발병 초기에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시기를 견뎌내고 나니까, 뭐든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될 것도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생각 없이 했어요. 치료도, 운동도. 그냥 단순하게 안 좋은 생각을 안 한 거죠.
최경아 비장애인들이 어떤 태도를 갖고 장애인을 대하면 좋을까요?
조은별 어려운 문제네요. 사실 그것에 대해서는 선천적 장애인, 후천적 장애인 사이에도 입장이 다르고, 또 어떤 장애를 가졌는지에 따라서도 다를 것 같아요. 저처럼 후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응원해 주는 게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서양 문화에서는 그게 익숙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는 듯해요.
최경아 사실 저 역시 라움콘을 통해 선생님께 인터뷰 요청을 드리면서 좀 망설였어요. 당연히 안 한다고 하실 줄 알았거든요.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자기 이야기가 노출되는 것을 꺼리시더라고요.
조은별 라움콘 송스날 선생님이 언젠가 워크숍을 중에 제게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어요. 이렇게 뭐든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뭐냐고요. 그래서 제가 대답했죠. 제 목표는 하나라고요. 많은 곳에 노출돼서 유명해지는 거라고. (웃음)
최경아 여러 차례 말씀하신 것처럼 뇌출혈 환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셔서 여기저기에서 좋은 영향을 자주 끼쳐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에 이 인터뷰가 한몫하기를 바랍니다. (웃음)
2023.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