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 공화국] 스텔렌보스
나는 영국에서 살고 싶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영국이란 나라가 좋았다. 그래서 3년 동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어학연수를 떠날 때도 주저 없이 영국을 선택했다.
일 년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뒤에도 영국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모든 삶을 접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계획을 세웠다. 영어공부를 계속하면서 그곳에서 취직을 하고 살 수 있게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나의 계획은 무산됐다. 엄마의 암이 재발했기에 나는 갈 수 없었다.
여행을 계획할 때가 가장 설렌다.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를 알아볼 때 신이 난다. 하지만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설렘도 잠시 주변을 경계하느라 예민해진다. 식당에 가방을 두고 화장실을 가도, 카페 야외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놔도 문제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살다 해외에 나가게 되면 조심해야 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남아공은 도착하기 전부터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 나라였다. 워낙에 치안이 좋지 않기로 유명해 단단히 각오는 했지만, 잠비아에서 만난 한국인이 그곳에서 강도를 당했다는 말을 했을 땐, 가지 말까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하지만 케이프타운을 가는 비행기 표도 이미 샀고 렌트한 차량에 대한 비용도 다 지불한 터라 안 가기에는 돈이 아까웠다. 무엇보다 다음 행선지인 나미비아를 가기 위해서는 남아공에서 비자를 받아야 했다. 남아공을 안 가면 나미비아도 못 가게 된다.
공항에서 우버를 타고 가는 길, 우버 기사가 가리키는 방향에 테이블 마운틴이 있었다. '저곳이 내일 우리가 갈 곳이구나'라고 감탄을 하며 오늘처럼 내일도 날씨가 좋기를 바라던 그 순간, 우버 기사가 비보를 전했다.
"내일부터 케이블카가 운행되지 않을 거야. 그래도 걸어 올라가면 되니깐 걱정 안 해도 돼."
첫 여행지부터 계획에 어긋 났다. 랑탕히말라야를 다녀온 후 등산은 우리와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케이블카 없는 테이블 마운틴은 가고 싶지 않았다. 위험한 요소를 줄이고자 나름 세밀하게 계획을 짰는데 모든 게 소용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다니기로 했다.
희망봉과 볼더스 비치 구경한 후, 스텔렌보스로 이동했다. 나는 운전을 하고, 둘째는 숙소를 찾고, 셋째는 내비게이션을 봤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기에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이럴 땐 우리가 셋이라는 게 참 고마웠다.
와이너리로 유명한 스텔렌보스는 아늑했다. 그 따뜻한 느낌이 좋아 그곳에서 이틀을 머물기로 했다. 덕분에 와이너리에서 여유롭게 와인을 마시며 엄마와의 추억을 서로 나눌 수 있었다.
둘째가 엄마와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여행을 하던 그때, 지금과 같이 와이너리 투어를 갔다.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던 엄마가 트림을 했다. 너무 큰 트림 소리에 같이 투어를 하던 외국인이 엄마를 쳐다봤고, 민망해하던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서로 웃어버렸다고 했다. 와인을 마실 때마다 하는 이야긴데도 질리지가 않는다. 엄마의 트림 소리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되기에 웃고 또 웃는다.
그렇게 웃다 갑자기 눈물이 난다. 엄마가 우리 곁에 없다는 게, 엄마와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져 또 운다. 그리곤 남은 여행 동안 싸우지 말고 행복하게 추억을 만들자며 서로를 다독였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 우리는 미묘한 감정싸움을 했다.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계획대로 여행이 되지 않아 서로 짜증을 냈다. 아이러니하게도, 계획대로 되지 않은 여행에 덕분에 이 곳에서 행복한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여행이란 게 참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비단 여행뿐일까.
인생도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영국에 가고 싶었던 나의 계획이 무산됐을 때, 뜻대로 되지 않는 나의 인생이 너무 싫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뿐인데 이것도 안 되는 건가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화도 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음에 감사했다.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옆에서 함께 할 수 있어서 슬펐지만 행복했다. 그러하기에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내 인생이 살아지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계획했지만 내 길이 아니기에 갈 수 없는 것일 뿐. 좌절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