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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Jul 24. 2024

상처받기 싫어서 다정함을 영끌했다

장애인 딸을 키우는 엄마가 선택한 다정함이라는 페르소나

"나는 어떤 엄마가 되고 싶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모호하다. 보통의 엄마로 살았을 때 나는, 다채로운 색을 가진 무지개 같은 엄마의 모습을 꿈꿨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기간은 너무 짧았고, 장애인의 엄마로 살아가야 할 짐이 너무 버거워서 어떤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아무래도 세 번째 연재 질문바꿔야겠다.


"나는 장애인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어떤 페르소나를 가졌을까?



7살 무렵이었다. 이사 간 동네에는 우리 집보다 먼저 살던 쌍둥이네라고 살고 있었다. 우리 집이 1층 단층집이었다면, 그 집은 담이 높은 이층 양옥집이었다. 그 집에는 백설공주처럼 피부가 흰 쌍둥이 자매가 살았으니 선희, 선영 자매였다. 장애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두 자매 모두. 나와는 2살 터울이었다.


쌍둥이 자매에게는 매사 똑소리 나는 엄마와 매일 양복을 입고 출근하시는 아빠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똑소리 나는 엄마라도 딸들에게는 늘 애잔했다. 삼시세끼 '한 숟가락만 더 먹자 '라는 애원담장 너머까지 들렸다. 똑소리와 애절함이 믹스된 목소리였다. 그 시절 내가 '모성애'라는 단어를 알았다면, 나는 그 목소리를 모성애의 모범답안이라 불렀을 것이다. 밥을 안 먹으면 윽박만 지르던 우리 엄마와는 너무 달랐다.  


쌍둥이 아줌마는 동네 아이들에게도 참 잘해줬다. 간식도 후했고, 생전 처음 보는 카메라로 단체사진도 남겨주신 변두리에서는 보기 힘든 도시형 엄마였다. 특히 나와 여동생을 집에 자주 초대했다. 쌍둥이들과 놀게 하려는 속내는 어린 나에게도 보였다.  이 방문, 저 방문 열고 다니는 쌍둥이 자매를 붙잡고 다니는 것은 놀이라기보다 임무나 책임 같았으나 부상으로 따라오는 간식의 유혹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꾸리꾸리하면서도 고소한 노란색 치즈맛을 알아버렸다. 어쨌거나, 쌍둥이 아줌마는 나에게는 좋은 사람, 좋은 엄마였다.


그런데 동네 어른들이 수군대는 쌍둥이 엄마에 대한 평은 달랐다. 옆집 아줌마하고는 담장에 넘어온 감나무 나뭇가지 하나로도 싸우는 동네 쌈닭이라고 했다. 우리 엄마조차 그 아줌마를 깍쟁이라 불렀다. 옆집과도 앞집과도 사이가 좋은 집이 없었다. 어느 날, 동네 공사 중인 집주인아저씨와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줌마가 시끄럽다고 항의하고 쌩하고 들어가자, 아저씨는 들어도 괜찮다는 듯이 욕을 했다.


"저러니 저런 새끼를 낳았지"


나는 그때 엄마 심부름으로 대문을 열고 나설 참이었다. 나는 마치 세상에 처음 듣는 비밀을 듣는 것처럼  대문을 열지도 닫지도 못한 채 '대문 앞 눈사람'이 되어버렸다. 지금 방금 들은 이 말은 쌍둥이 아줌마는 제발 듣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들었다면 많이 아플 것 같았다.


우리 별이가 4살쯤 되었을 때  별이가 아무래도 선희, 선영 자매처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이가 7살쯤에야 선희, 선영 자매처럼 자라고 있음을 비로소 완전히 받아들였다. 그때 문득문득 쌍둥이 자매 생각을 많이 했다. 그녀들의 엄마인 쌍둥이 아줌마에 대한 생각은 더 오래 했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시집은 갔을까? 아직 엄마 아빠랑 살고 있을까? 그럼 아줌마는? 살아계실까? 아프시지는 않을까? 내가 '대문 앞 눈사람'이 되던 날 들었던 그 수군거림을, 그 비슷한 참담한 뒷말들을 얼마나 듣고 살았을까?


"저러니 저런 새끼를 낳았지"


내 귓가에 꽂혔던 저 어절이 내게로도 향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혹여라도 내가 깍쟁이 거나 사나운 엄마가 되면 마치 그 업보로 장애인 딸을 낳은 거라고 수군댈지도 모를 낯선 사람들의 사나운 인심과 매서운 시선이 두려웠다. 물론, 나는 순둥 한 편이었다. 이미 어릴 때  장애가 있는 쌍둥이 자매를 너그럽게 받아줄 순둥이로 쌍둥이 아줌마에게 낙점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다정함을 모두 영끌했다. 다정함은 이웃에 대한 친절한 사소함에서 나타났다.


별이와 함께 택시를 타고 천 원 미만의 거스름 돈을 받아야 할 때면

"기사님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별이와 함께 식당을 갔는데 오래 기다린 메뉴가 뒤바뀌어 나왔을 때도

"그냥 먹을게요. 괜찮습니다."

별이와 함께 복지관에 가려는데 동네 어머님 친구분만나면  

"아주머니 놀러 오세요. 짜장면 시켜드릴게요"


적어도, 택시 기사님은  식당 아주머니는 동네 어르신은 나를, 장애인 딸을 가진 친절한 나를, 최소한 전생의 업보라고는 여기지는 않겠지 싶었다. 어리석은 위안이었다. 애당초 '저러니 저런 자식을 낳았지'는 해서는 안될 말이며, 그런 말 따위로 상처를 받는 것조차 아까운 말이었다.


물론 별이와 함께 한 일상이 친절과 다정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육청에다 학교에다 거센 항의를 한 적이 있었다. 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 특수실무사가 예산을 핑계로 배치되지 않았다. 별이는 화장실도 교실 이동도 혼자 할 수 없는 아이였다. 무작정 교육청에 전화를 걸고, 교장 선생님께 항의를 했다. 바뀐 건 없었다. 높은 사람에게 대항하는 잠깐의 속풀이였으며, 어설픈 항의에 대한 답변은 전학 가셔도 좋다는 권고로 돌아왔다. 입 다물며 살아야 한다는 건가?  나의 분노와 악다구니가 통하지 않는다는 처절한 좌절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차라리 웃으면서 친절하게, 애석하게 차근차근, 잘근잘근, 말했으면 통했으려나?


어쨌거나,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친절과 다정함이라는 가면이 이제는 내 얼굴처럼 편안한 내 진짜 모습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작은 것에 후한 사람이 되었다. 일종의 친절 품위유지비처럼 작은 씀씀이가 헤픈 사람이 되었다. 나는 쓸데없는 농담도 헤픈 편이다. 내 말의 반에는 알맹이가 없다. 터지는 입마다 물컹한 과즙 같은 농담이 솟는다. 기분 좋은 말들이 상대방을 성나게 할 일이 없다. 친절과 다정함은 친절과 다정함으로 돌아온다.  아주 평안하고 즐겁다. 가족과 회사 동료와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즐겁다. 어쩌면 이게 다 친절하고 다정한 페르소나를 가지게 해 준 우리 별이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Epilog


우리 별이는 엄마 껌딱지다. 퇴근 후 돌아오면, 사소한 말들로 쉴 새 없다. 내가 똥 누러 갈 때도 쫓아온다. 냄새가 나면 구역질을 하면서도 후각이 둔감해질 때까지 화장실에 함께 있으며 쫑알거린다.

엄마의 수다도 만만치 않다. 어제 내가 별이에게 던진 질문이다.

"너는 엄마가 어떤 엄마였으면 좋겠어?"

잠시 대답이 없다. 질문이 너무 뜬구름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좀 더 쉽게 다시 묻는다.

"엄마가 너한테 어떻게 대해 줬으면 좋겠어?"

"친절했으면 좋겠어. "

"뭐? 엄마가 안 친절해?"

"가끔씩 소리 지르잖아. 친절하게 말했으면 좋겠어"


세상에나, 소름이 돋는 순간이다. 글자를 모르는 별이가 내 저장글을 몰래 훔쳐봤을 리는 없을 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정작 우리 별이에게 나는 불친절한 엄마였을까?

요즘,  자아가 커진 별이는 이불 좀 정리해, 안 돼, 조심해 다쳐, 이런 딱딱한 말투에 상처를 받는 모양이다. 복지관 사회복지사들이 불친절하다고 불만을 가지는 것도 같은 맥락 같다.


정말 유리그릇 같은 아이, 아니 이젠 아가씨다. 좀 더 친절하고 다정한 엄마가 되어야겠다. 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의 페르소나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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