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숨의시간 11화

20년 쓴 전화번호를 바꾸고 나니

by 잔별

두 달 전, (혼자 내린 정의인) 일신상의 이유로 전화번호를 바꿨다. 살짝 베어 문 사과 로고가 상큼하게 박힌 아이폰이 지구상에 출시된 이후 자칭 아이폰 빠순이로 아이폰만 고집하던 나는 이 참에 스마트폰도 아예 바꾸기로 결심했다.


아이폰은 아이클라우드가 있고, 그놈의 연동체계가 워낙 확실해서 연락처고 뭐고, 앱이고 뭐고, 그대로 다 새 폰에 저장된다. 그래서 그동안 아주 편리하기도 했지만.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이폰을 내팽개 칠 수밖에 없었다.


아이폰은 아주 친절해서 기존의 나의 온갖 추억들을 자주 상기시켜 준다. '지난해 ***에서의 추억' '즐거웠던 **와의 추억' 따위를 운운하며,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사진을 액정에 뜨게 하고, 자주 내 뒷골을 때릴 터였다.


그래서 심플하게, 추억이든 과거든 뭐든 아이폰과 함께 고이 꺼버리겠다는 심정으로 20년 동안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는 휴대 전화번호를 바꿔 버렸다. 스마트폰도 함께! 삼성에서 밀고 있는 새끈한, 접히는 폰은 예뻤고, 그립감도 좋았다. 새로운 번호와 새 폰과 함께 나는 조심스레 새 출발을 꿈꿨다.


기존 연락처에 등록된 사람이 200명이었나, 300명쯤이었나... 아무튼, 정말 간소하게 레알 진짜만 추리니 30여 명 정도만 카카오톡 친구에 떴다.

전화번호를 바꾸고 카카오톡 앱을 깔고 나니, 지저분하게 쭉 늘어나는 이름들이 없어서 좋았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굳이 의도치 않았지만, 마치 모두 의도한 것처럼 나는 누군가의 폰에서, 또는 인생에서 사라졌다. 사라질 수 있었다. 전화번호 하나 바꿨을 뿐인데, 나는 이 세상에서 '증발'한 것 같은 일종의 자유를 느끼기도 했다.


타인과의 연결고리란 이토록 얄팍한 것이다. 전화번호만 바꾸고, 잠시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 아무도 날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인이나 가족과 연결된 사람이 없이 오직 1:1로 맺어진 관계라면 더더욱. (누군가 사설탐정을 사서 일부러 나를 찾아내기 전까진!)


20년 썼던 전화번호라 그런지 바꾸려니 애착도 많았다. 아직도 어딘가에 전화번호를 쓸 때면, 예전 번호를 쓰곤 한다. 이제 나는 수많은 진상들과 (일하면서 만났던) 헤어졌고, 헤어졌던 누군가와도 완전히 연이 끊어져 버렸다. 새벽에 행여라도 '자니?' 같은 문자가 오는 일은 이제 아주 없을 것이다.


내가 연락처를 준 사람들은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고, 나의 아픔을 공감해 주고 같이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몇몇은 일 때문에 (그래도 소중하다) 주기도 했지만, 이 작은 인연의 끈을 나는 다시 잘 이어나가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채워질 새로운 인연들도, 많진 않아도 되지만, 소소하게 몇몇은 채워지길 바란다.


전화번호 하나 바꿨다고 인생이 통째로 달라지진 않겠지만, 과거의 어떤 부분들과 확실한 이별을 했다. 어떤 이별이든 씁쓸함은 조금 남는다. 후련함도 그렇고. 그래도 슬프진 않아서 다행이다.


조용하게 꺼둔 나의 아이폰은 수많은 추억들과 내 서랍 속에서 고이 잠들고, 나는 엣지있는 새 휴대폰의 화면을 접었다 펴면서 새것의 그립감을 만족스럽게 감각한다.


새해가 지나가고 있고, 과거도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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