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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별 Oct 27. 2023

무알콜 맥주 같은 인생

서른둘, 원룸 오피스텔을 얻어 처음 독립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있다면, 냉장고 가득 맥주를 각 잡아 세워 놓는 일이었다. 버드와이저, 필스너, 기네스, 칭다오 , 스텔라, 하이네켄... 종류별로 쟁여놓고 거의 매일 맥주캔을 깠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차가운 맥주 캔을 딸 때, 톡 하고 터지는 소리와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올 때의 그 청량감이란~!  고된 일을 끝내거나 막 샤워를 마치고, 맥주 캔을 딸 때의 그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사랑했었다. 나는 이제 내 집에서, 아무 때나 맥주를 깔 수 있는 진짜 '성인'이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는 아무리 맥주와 고열량의 안주를 많이 먹어도 쉽게 살이 찌지도 않았다. 지금처럼 간 수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10년이 지났다. 나는 다시 복층 오피스텔을 얻어 새 삶을 시작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 내 냉장고에는 그때처럼 맥주가 가득하지 않다는 것. 그때의 독립이 완전히 자의적인 것이었다면, 지금의 독립은 타의적인 일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달라진 게 어디 그뿐이겠는가. 10년이란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 놓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혼자 사는 것이 마냥 설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30 초반에서, 혼자 사는 일이 사실은 완벽하게 자유롭지도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40대 초반으로 와버렸다. 그 10년 동안 나는 몇 번 연애도 했고, 꾸준히 일도 했으며, 진짜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었다. 지금은,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사실 작년 여름, 다시 혼자 살게 된 뒤, 그때처럼 자주 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결과가 처참했다. 예전에 비하면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체중이 너무 빨리 느는 것 같았다. 기분도 우울한데, 달라지는 몸을 보니 더욱 우울해졌고, 몇 캔 마시지도 않았는데, 쉽게 취기가 올라왔다. 혼자 마신 술의 취기가 우울을 끌어왔다. 맥주를 마시며 맛있는 안주를 먹는 게 인생의 낙이었던 사람에게, 가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맛있는 맥주를 어떻게 끊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딱 끊지는 못하더라도 참아라도 봐야겠다 싶었다.


지금은 일주일에 1-2번 정도 맥주를 마신다. 일주일을 참았다가 포상이 필요한 금요일이나 친구와 약속이 있을 때 풀어놓고 먹는 식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맥주를 참 애정한다. 그런 내게 무알콜 맥주란 것이 과연 신세계를 가져다줄 것처럼 보였다. 알코올이 없으면서도 칼로리가 낮고, 게다가 진짜 맥주와 맛은 거의 흡사하다는 거였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새로운 즐거움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맥주를 알코올 기운 때문이 아닌, 진심으로 맛이 있어서 먹는 류의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저녁,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가 2+1으로 행사하고 있는 무알콜 맥주를 발견하게 됐다. 무알콜 맥주는 진짜 맥주와 똑같이 생겼는데, 가격은 훨씬 착했다. 게다가 알코올도 없다고 하니, 탄산수 마신다고 생각하고 막 먹어도 되는 거 아니야? 캬캬캬. 이렇게 신박한 게 있었다니! 하며 얼른 집어왔다.


내가 스트레스 받을 때 자주 먹는 마라샹궈를 시켜놓고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무알콜 맥주를 땄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기포가 올라왔다. 지체 없이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데, 오잉?! 이게 무슨 맛이야? 뭔 맛인지 모르겠는데? 혹시나 싶어 한 모금, 또 한 모금 먹어봤다. 그래도 무알콜 맥주는 맛이 없었다.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이게 무슨 맥주라고~ 감히 맥주 흉내를 내? 무알콜 맥주가 맛이 없어서 화가 났다. 밍밍한 데다 맛도 없었다. 게다가 알코올도 들어있지 않으니, 먹어봤자 기분이 좋아지지도 않는다. 얼얼한 매운맛과 알싸한 맥주의 콜라보를 기대한 저녁을 망치고 말았다. '내 다시는 무알콜 맥주를 사지 않으리.' 하나마나한 결심을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지금의 내 인생이 꼭 알코올이 빠진 맥주 같다고. 밍밍하고 맛도 없고, 진짜 맥주도 아닌 주제에 맥주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다고. 앞으로의 내 인생이 무알콜 맥주처럼 재미없고 밍밍하기만 하면 어떡하냐고. 그렇다면, 지금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좋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일단, 오늘은 냉장고 속 무알콜 맥주 옆에 있는, 진짜 맥주 한 캔을 딸 작정이다.



글쓰기가 잘 되지 않던 몇 달이 또 흘러버렸네요.

다시 서 보기 위해 연재 브런치북을 시작해 보기로 했어요.


어쩌면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무알콜 맥주 같은 인생'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많이 응원해 주시면 힘이 되겠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려요.


* 매주 금요일, 새 글이 발행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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