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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별 Nov 10. 2023

우울과 비우울의 경계에서 산다

우울과 상실 이후의 삶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맑았다가, 어떤 날은 흐릿하고 멍한 현실을 살아간다. 우울과 불안증세가 심했던 작년, 일 년 정도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았다. 뇌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충격적인 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했지만, 일 년 만에 정신의학과를 졸업할 만큼 삶에 대한 의지와 회복탄력성이 좋은 편이었던 나는, 병원을 나서면서 생각했었다. 앞으로는 좋아질 일만 남은 거라고. 


하지만, 이후에도 힘든 날은 자주 찾아왔다. 더 이상 항우울제나 수면유도제에 기대서 생활하지 않아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길을 걷다가 밥을 먹다가 요가를 하다가, 축구를 보거나 운전을 하다가 또 예쁜 하늘을 볼 때마다... 상실에 대해 자주 자각했고, 그럴 때마다 허탈감과 우울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 집에 이사를 오고선, 한 달 정도 심한 불안증세가 지속되기도 했다. 앞으로는 좋아질 일만 남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시에 찾아드는 우울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나는 앞으로 더 좋아져야만 해. 

나는 그래도 잘 살아갈 거야. 

간신히 부여잡은 정신줄을 놓칠까 봐. 

다시 우울했던 과거로 돌아갈까 봐 몹시 두려웠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우울증에 걸린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나는 약을 먹을 만큼 우울하지 않고,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며, 내 상태는 그만큼 심각하지 않은 거라고. 하지만, 상태가 좋아지기 위해선 우울을 인정하는 데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지금, 평소보다 아니면 그 사건이나 상황이 벌어지기 이전보다 정신이나 심리상태가 좋지 못한 상태이고, 필요에 따라 치료를 받거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앞으로 내가 좋아지기만 할 거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에, 불쑥 찾아드는 우울이 반갑지 않았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까 봐 두려웠고, 그 고통을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 역시 좋아지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울과 비우울의 경계는 언제나 넘어갈 수 있는 '경계'라는 것을. 그리고 우울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우울감은 상실에서 온다고 한다. 그 상실이 건강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재산이든, 만성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상실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오은영 박사는 조언한다. 


나는 충분히 우울할 수 있는 경험을 했고, 그래서 정신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나의 우울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오은영 박사님이 국민 힐러가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




우울과 상실 이후에도 삶은 이어진다. 

이것은 축복일까? 불행일까? 


나는 매일 우울하지도 매일 행복하지도 않은 일상을 살아간다. 

이것은 정상일까? 비정상일까?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이것은 희망적일까? 비희망적일까?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우울과 비우울, 정상과 비정상처럼 이분법으로 나눌 순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은 설명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일들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어떤 날은 좋았다가, 아닌 날도 있다가, 그렇게 경계 속을 걷다 보면, 매일 조금씩 나아가고 있을 거라 믿어보기로 한다. 시간이 다소 느리게 흐른다고 느껴질 때도 조바심 내지 않기로 해보자. 




넷플릭스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인상 깊게 보면서 나의 현재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 드라마를 대변하는 대사이면서, 나에게도 울림을 준 대사로 마무리한다. ( 드라마 너무 좋다. 추천!)



우리는 모두 경계에 서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서있던 병희는
자신만의 해답을 찾았고

불안과 안정에 경계에 있던 유찬은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방법을 찾았고

우울과 비우울의 경계에 있던 나는
우울보다 먼저 찾아와 주는 그 사람이 생겼다.

우린 모두 낮과 밤을 오가며 산다.

우리 모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경계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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