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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경 Aug 17. 2023

그 많은 시계는 누가 다 샀을까?

워치스 앤 원더스 2023(Watches and Wonders 2023)에서 발표된 시계 중 나의 최애는 오리스(Oris)의 프로파일럿 X 커밋 에디션(Oris)


그 많은 시계는 누가 다 샀을까?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유튜브 채널 <생활인의 시계>에 묘한 영상이 올라왔다. 2023년 8월 15일 자 영상이 그것인데(<정말 추천하지만 이상하게 사지는 않게 되는 시계들 특집>), 김생활씨와 고석민씨가 출연해서 수다를 떠는 게 영상의 전부다. 둘이 나와서 이야기하는 논지는 말 그대로 '내가 추천은 하지만 내가 사지는 않은 시계들'에 대한 것이다. 아저씨 둘이 나와서 재미지게 떠드는 영상을 끝까지 보고 깨달은 게 있는데, 그 많은 시계들을 사는 사람이 거의 없겠구나 싶은 것이다. 아니, 뭐, 있긴 하겠지, 그렇지만 언제나 우리의 예상보다는 적겠지 싶은 것이다.


언젠가 '시계가 그렇게 신상품이 자주 나올 수 있는 제품이냐'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꽤 자주 나온다. 지난 2023년 3월 27일부터 2023년 4월 2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워치스 앤 원더스 2023(Watches and Wonders Geneva 2023) 행사가 열렸다. 시계와 관련한 가장 국제적인 행사이자, 각국의 시계 회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성과를 자랑하고, 올해의 새로운 제품들을 소개하는 자리다. 2023년에는 일주일 동안 총 125개국, 43,000명이 참석했으며 48개 브랜드가 자신들의 시계를 선보였다[1]. 이것만 보더라도 시계 산업 내부에서 신상품을 내는 일은 길게는 매년, 짧게는 매월 단위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계도 생산하는 만큼 많이 팔릴까? 일단 시계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 같다. 2022년 스위스 시계 산업은 총 248억 스위스 프랑의 매출을 올렸다(24.8 billion Swiss francs, 한화로 약 36조 원). 그런데 희한한 건, 2015년까지 총 2,810만 개의 스위스 시계가 팔렸는데 2022년엔 총 1,580만 개에 그쳤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로빈 스위든뱅크(Robin Swithinbank)는 이것이 단순히 시계 개수 상승에 의한 게 아니라 가격 상승에 의한 것이라고 기사에 적었다[2]. 다시 말해, 시계는 더 안 팔리고 있지만, 가격은 더 오르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선 제품이 팔리지 않으므로 대신 제품의 가격을 올린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 시계들은 나같이 평범한 생활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시계가 안 팔리면 어디로 갈까? 그레이마켓으로 간다. 거기가 어디냐면, 대부분의 팔리지 않은 재고들이 흘러들어 가는 시장이다. 그레이마켓(grey market)이라는 말은 보통 제품의 원래 제작자나 소유자에 의해 허가받지 않은 유통경로를 통해 제품이 거래되는 시장을 일컫는데, 소위 말해 정식 경로가 아닌 다른 유통 경로를 통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을 말한다. 합법(백색)과 불법(흑색) 사이에 놓인 시장이라 회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부분의 해외 직접 구매를 할 때 가격 혜택을 보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도 그럴게, 정식 루트를 통한 보증, 제품의 상태, 소비자 서비스 등에 투자하지를 않기 때문에 상품의 가격이 저렴하다. 시계 산업에서도 애쉬포드(ashford)나 조마샵(jomashop) 같은 그레이마켓이 존재한다. 즉, 과장해서 말하면 이곳은 끝끝내 팔리지 않은 시계들의 무덤 같은 곳이다.


생각해 보면 시계는 재구매가 상대적으로 적은 상품이다. 스마트폰은 2년마다 바꾸어도 기계식 시계는 그럴 수가 없으니까. 더군다나 너도 나도 긴 파워 리저브(power reserve), 방수, 방진, 충격방지, 자성저항 등 최고급 기능들을 기본으로 요구하는 마당이니, 시계는 소비 기한이 짧으래야 짧을 수가 없다. 중고 시계를 생각해 보자. 사용이력을 알 수 없을 만큼 여러 주인들의 손에 거래가 된 중고 시계가 수두룩 빽빽이지 않은가. 심지어 50년, 100년도 더 된 빈티지 시계들을 수리해서 쓰기도 한다. 하나의 시계가 시장에서 살아남아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일은 그러므로 재수, 삼수, N수의 수험생들이 겹친 수능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수능생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자. 그 많은 시계는 누가 다 샀을까 했는데, 아무도 안 사고, 그 많은 시계들은 그레이마켓으로 흘러간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새로운 시계를 사는 일보다 이미 있는 시계를 사용하는 일이 언제나 더 어렵고 더 의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참고자료>
[1]Europastar, WATCHES AND WONDERS GENEVA: RECORD FIGURES FOR THE 2023 EDITION, https://www.europastar.com/time-business/1004113292-watches-and-wonders-geneva-record-figures-for-the.html(20230817최종접속)
[2]Thenewyorktimes, It’s Simple: Fewer Watches, Higher Prices - The New York Times, https://www.nytimes.com/2023/07/23/fashion/watches-production-prices-switzerland.html(20230817최종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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