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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경 Dec 01. 2023

한동안은 시계에 대해 쓸 맛이 나지 않았다

Davidoff Very Zino 20374. 이렇게 생긴 시계도 시중에 나왔었다니, 독특하고 예쁘다(Ashford)


한동안은 시계에 대해 쓸 맛이 나지 않았다




사기당한 후 지금, 시계에 대해 다시 쓸 맛이 난 것은, 결국 시계를 다시 샀고, 또 시계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빈티지 시계에 또 손을 댔고, 생활비에 여유가 생겨 미루고 미루던 시계도 수리하였다. 미루어두던 유튜브 시계 채널도 다시 보기 시작했고, 시계에 대한 생각도, 중고시계글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었다(‘너무 저렴한데, 사기꾼인가?’).


내게 시계가 갖는 의미는 여러 가지이다. 앞서도 몇 번 언급했듯이 남성성의 과시이고, 명예에 대한 허영심이고, 나는 당신과 다르다는 헛된 자긍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 상품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지난 4년간, 그리고 지금 시기의 내게는 시계가 그렇다.


남성성도, 명예도, 헛된 자긍심도 빼고 시계를 바라본다면, 내게는 공예품과 같다. 명품과는 다른, 신기한 공예품. 애플워치 같은 스마트 워치도, 지샥(G-Shock) 같은 디지털시계도 좋지만, 어쨌든 대규모 생산이 조금은 힘들면서 구시대의 기술적 성취에 기대고 있는 물건으로서의 기계식 공예품.


크로노미터(Chronometer)는 현대 기계식 시계 산업에서 시계 무브먼트의 정확성을 나타내주는 지표 혹은 상징이다. 시계의 무브먼트는 특성상, 여러 가지 자세에서 물리법칙에 따라 다르게 굴러간다. 시계가 손목 위에 있을 때, 책상 위에 있을 때, 주머니에 있거나, 시계함에 있을 때 시계가 받는 중력, 온도, 습도, 자성 등의 외부 영향력이 시계 무브먼트에 영향을 준다. 크로노미터는 이러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시계가 얼마나 정확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 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아무리 뛰어난 기계식 시계라도 다음날이 되면 꼭 시계가 느려져 있거나 빨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연적인 불확실함과 오차가 이 기계식 시계의 전제인 것이다. 디지털 기반의 시계들은 거의 혹은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는 이 오류가 내가 좋아하는 기계식 시계의 선결조건이면서 존재의 필요조건이다.


공예품, 아무리 값싸거나 아무리 비싸더라도 기계식 시계가 다루는 영역은 아날로그 수공예에 기대어 있다. 지금 내 손목 위에서 이토록 낡고 오래된 기술이 움직이고 있다는 게 생경할 지경이다.




한동안 시계와 가격과 돈과 브랜드와 명성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간을 가졌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도 사기당한 돈으로 배운 교훈 치고는 나쁘지 않다. 글을 쓰고 있지 않던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시계의 태엽을 감고 있었고, 매일 내 시계함의 시계들을 소중하게 생각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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