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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경 Dec 03. 2023

빈티지 세이코 시계에 다시는 손대지 않으리라

빈티지 세이코5 7s26 01v0. 2000년대에 생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겨우 살려낸 빈티지 세이코 시계이다.


빈티지 세이코 시계에 다시는 손대지 않으리라




그렇게 맹세했건만, 결국 빈티지 세이코 시계에 나는 다시 손을 대고 말았다. 시작은 당근 마켓에 올라온 한 가지 시계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빈티지 시계를 잘 모른다. 그럼에도 그러한 시계가 주는 매력이 좋아서 혼자 동묘벼룩시장도 돌아다녀보고, 인터넷 빈티지 시계 시장도 둘러보고, 국내외 중고시장 사이트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값비싸진 않지만, 정말 갖고 싶었던 빈티지 세이코 시계를 몇 점을 손에 넣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빈티지 시계는 대부분의 경우 수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 있다. 한번 사놓은 상태로 평생 쓸 수 있는 물건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물건이든 주기적인 정비와 수리가 필요한데, 빈티지 시계의 경우에는 그런 정비와 수리에서 놓여난 채로 오랫동안 방치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사용 이력을 알 수 없는 시계를 샀다면, 그 시계의 현재 성능을 충분히 의심해 보고 정비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내가 소중히 여겼던 빈티지 시계들은 결국 지금 내 손에 단 한 점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한점 한점 정성스레 수리를 했었고, 그 시계가 쓸만한 성능을 보일 때는 기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새 시계에 비해 항상 성능은 의심스러웠고, 내가 만들지 않은 자글자글한 흠집들 때문에 쉽게 다룰 수도 없었다. 결국 그 시계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시계함에 머물다가 헐값에 팔려나갔다.


다시는 빈티지 시계를 사지 않으리라. 그 상대적으로 신제품보다 저렴한 가격에도, 지금 시대 이전의 독특한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지난달, 당근마켓에 올라온 빈티지 세이코 5 7s26 01v0을 2만 원에 샀다. 누구보다 빠르게 판매자에게 구매의사를 밝힌 나는 퇴근길을 부랴부랴 달려서 시계를 구할 수 있었다.


빈티지 시계가 내게는 맞지 않는다는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시계의 상태가 좋았다. 가격도 좋았고, 마침 그날 퇴근 이후에 아무런 일정도 없어서 당근 거래도 할 수 있었다. 시린 손을 꼭 부여잡고 나는 지친 상태로 빈티지 세이코 5와 집에 돌아왔다.


물론 시계에는 큰 결함이 있었다. 시계의 무브먼트가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직접 일오차를 맞춰본 실력을 살려 직접 7s26 무브먼트를 고쳐보기로 했다. 그리고 무브먼트는 나의 손길을 지나 완전히 망가졌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나는 결국,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대체할 수 있는 무브먼트를 4만 원에 구입했다.


평일 연차를 내고, 내가 좋아하는 시계점에 가서 무브먼트를 통째로 바꿔버렸다. 하루이틀 시계를 만진 게 아닌 사장님께서는 뚝딱뚝딱 시계의 무브먼트를 새것으로 바꿔주셨다. 이 과정에서 2만 원이 들었다. 시계는 건강히 잘 움직였고, 나는 사장님께 연거푸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며 집에 돌아왔다.


총 8만 원의 비용, 약 20일의 시간, 약 3일에 걸친 인터넷 조사, 1일의 연차, 그리고 약간 발품을 팔아 나는 괜찮은 외관과 (내가 해먹은 무브먼트보다) 더 나은 스펙의 무브먼트를 지닌 빈티지 세이코 5를 얻게 되었다. 지금까지 구입한 빈티지 시계가 약 5개쯤이었고, 그중 1개 만을 살려냈으니, 나의 빈티지 시계 승률은 20% 정도 된다.




당근마켓 채팅을 걸 때도 나는 조금 후회를 했고, 직거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조금 후회를 했다. 이것을 구매함으로써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눈에 훤했기 때문이다. 결코 높지 않은 확률로 나는 지금, 실사용은 가능해진 빈티지 시계를 손에 넣었다. 나의 무모함과 성급함, 부주의함을 상징하는 이 시계와 나의 관계에 장수와 번영과 포스가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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