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계식 시계는 럭셔리(luxury) 하지 않다. 그렇지만 내 기계식 시계는 시간을 제대로 알려준다. 따라서 내 기계식 시계는 럭셔리할 필요가 없다. 그게 이 글의 결론이다.
사치품, 명품, 고급품을 일컫는 영어 단어 럭셔리(luxury)의 어원은 ‘지나침’이나 ‘잉여’를 뜻하는 라틴어 럭수스(luxus)에 있다. 다시 말해 럭셔리는 ‘어떤 필요를 의식하지 않는 그 자체로 목적을 갖는’ 특성을 지닌다.
기계식 시계는 필요에 기초한 물건이었다. 태엽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로서 발명되었고, 시계학(horology, 측시학)은 이러한 장치를 통해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학문이다.
1969년 12월 25일, 일본 시계 회사 세이코(Seiko)는 아스트론(Astron)을 내놓는다. 최초의 상업용 쿼츠(quartz, 석영) 시계의 등장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기계식 시계는 더 이상 필요에 기초하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예전과 같은 필요에 기초하지 않는다. 시계는 시간을 측정한다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계 그 자체로 목적을 갖기 시작한다.
론진(longines)이 왜 중요한가? 론진이기 때문이다. 롤렉스(Rolex)가 왜 중요한가? 롤렉스이기 때문이다. 파텍필립(Patek-Philippe)이 왜 중요한가? 파텍필립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계가 아니다. 손목 위에 올린 1,000달러, 10,000달러, 100,000달러짜리 채권이다.
기계식 시계가 어디까지나 시간을 보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을 다시금 머릿속에 명확하게 깨달았을 때, 내 시계의 흠집이 어디에 있고, 내 시계가 오차가 얼마나 나고, 내 시계의 리테일 가격이 얼마인지는 더 이상 중요한 고려점이 아니었다. 무브먼트가 제대로 동작하고 있는지, 디자인의 완성도는 괜찮은지, 오늘 내가 입고 나갈 옷 혹은 내가 계획한 활동과 잘 어울리는지가 중요해졌다.
내가 가진 기계식 시계들은 이미 나의 생활 수준을 한참 웃돌고 있다.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빈둥거리고, 조깅하고, 공부하는 삶에서 시계가 좋아봤자 얼마나 좋아야 하겠는가.
더 이상 시계를 늘릴 이유가 없다는 걸, 지금 갖고 있는 시계를 열심히 쓰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는 걸, 시계가 시간만 잘 맞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닫는다.
내가 가진 시계는 럭셔리할까? 그렇지 않다. 내가 가진 시계는 럭셔리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내가 가진 시계는 충분할까?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