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태경 Jul 03. 2024

딱 1개의 시계

"구독자 님, 직접 뵙고 시계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feat. 해밀턴 익선스토어)." 유튜브 비디오, 34:59. SHW 생활인의 시계, 2024.1.


딱 1개의 시계




최근 나의 생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시계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시계 생활을 하다 보면 말도 안 되는 행운이 가끔 찾아오긴 했다. 나한테 꼭 맞는 시계줄을 찾는다거나, 궁금해서 사 본 시계가 마음에 쏙 들었다거나, 중고로 산 기계식 시계의 오차가 거의 없다거나. 하지만 보통 행운이라고 한다면 아주 저렴한 가격에 아주 좋은 시계를 구하는 경우가 그랬다.


이전에 중고 시계를 구매하는 이유와 매력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러한 가격 대비 성능의 비율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고 시계는 특성상 판매되는 가격에 비례해 시계가 주는 성능이 천차만별이다. 가격이 저렴할수록, 구성품이 완전할수록, 상품에 결함이 거의 없을수록 가격 대비 성능의 비율은 들쑥날쑥해진다. 그래서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만원 떼기라도 좋으니 가격을 높이거나 낮추려는 신경전이 생기는 것 같다.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중고 거래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 되기 십상이다. 한쪽의 불이익은 곧장 다른 쪽의 이익이 된다. 판매자(구매자)의 절박한 사정은, 무엇이 되었든, 구매자(판매자)의 기막힌 행운으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한 가격에 아주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값비싼 시계를 손에 넣는 일이 벌어진다.


최근 나의 생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시계를 손에 넣은 뒤로 변화가 생겼다: 시계에 대한 관심, 애정, 흥미가 다시 생겼다. 아니다. 시계에 대한 관심, 애정, 흥미가 아니라 시계에 대한 자신감이 다시 생겼다.


최근 나의 생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시계를 손에 넣은 뒤로 시계를 다시 즐기게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전에 즐겨 보았던 유튜브 채널 <생활인의 시계(SHW)>를 다시 즐기게 되었다. 한동안 <생활인의 시계(SHW)>에 업로드되는 시계의 소매가가 내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이유로 질투심이 들어 영상을 보지 않았다. 그러나 값비싼 시계를 손에 넣으면서 그동안 보지 않았던 모든 영상을 다시 챙겨보고 있다. 이렇게 시계를 다시 애정하고, 시계를 다시 향유하면서, 시계에 대한 글을 다시 쓰게 되었다.


딱 20개 안팎의 시계 무리 안에 딱 1개의 시계가 들어왔을 뿐인데, 내가 가진 시계 컬렉션의 값어치가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 마치, 내가 가진 컬렉션의 가치가 가장 낮은 시계의 값어치부터 가장 높은 시계의 값어치가 지닌 스펙트럼인 것처럼. 내가 가진 컬렉션의 가치가 10만 원에서 100만 원이었는데, 10만 원에서 200만 원이 된 것처럼.


시계의 가격대는 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의 품격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시계의 가격대로 시계의 품격을 결정한다. 재보고, 판단하고, 추정하고, 평가하고, 결정한다. 상대의 시계가 비싸다면 나의 시계를 감추고, 상대의 시계가 값싸다면 나의 시계를 드러낸다. 시계의 가격대는 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의 품격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납득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다.


사실 유튜브 채널 <생활인의 시계(SHW)>를 좋아하는 이유는 호스트 김생활(김성준)이 각 시계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10만 원이든, 100만 원이든, 1000만 원이든, 각 시계 자체를 주인공으로 놓고 시계를 다루고, 소개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그래서 <생활인의 시계(SHW)>의 모든 영상을 1번씩, 10번씩, 100번씩 돌려본다. 채널의 호스트 김생활만큼이나 시계의 가격이 품격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도 없다고 느낀다.


최근 시계를 구매하게 되면서, 시계 영상을 다시 찾아보게 되었고, 시계를 다시 애정하게 되었고, 시계에 대한 글을 다시 쓰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시계의 가격과 품격을 바라봄에 있어 균형을 잡는 법이 아니라, 시계의 가격과 품격을 바라봄에 있어 기울어져 있는 나의 모습이다.




시계의 가격대는 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의 품격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납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시계 생활의 장수와 번영과 포스가 함께 하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