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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hadi Jul 17. 2022

쓰다 보면


고등학교 시절, 매일 만나는 친구들인데도 할 말이 얼마나 많았던지. 야간 자율 학습까지 하면 밤 11시에 끝이 난다. 그러고도 독서실에 같이 가 12시 - 1시쯤 헤어져서 아침 7시도 안 되어 만나는데 그 사이 또 할 이야깃거리가 그득그득 쌓인다.


자주 만나는 사이에 할 말이 더 많아지는 아이러니.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니 할 말이 없다. 세월이 흐른 만큼 서로의 삶이 너무도 달라졌다. 추억팔이를 하다 결국 기승전 재테크 이야기로 끝이 난다. 그래도 얼굴 보니 좋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됐다.


글도 비슷하다. 자주 쓰다 보면  이야기가 꼬리의 꼬리를 무는데 오랜만에 쓰려고 하면 도저히 쓸  없다. 틈틈이 써둔 일기를 뒤적거리며 무슨 이야기를 쓸까 고민한다. 며칠 전 자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라 유레카! 를 외치며 끄적여둔 메모는 알아볼 수가 없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검은 잉크에 영원히 갇혀버린 그 생각들이 궁금하다. 뭐였더라. 내가 멋진 생각을 했던 건 분명한데!


나는 어릴 적부터 염세주의자의 면모를 물씬 풍겼다. 인생이란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 아닌가. 하지만 살다 보니 이런 태도는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타고난 성격을 바꿀 수는 없지만 최소한 노력이라도 해야지. 내가 찾은 방법은 하루하루를 잘 기록해두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을 잊어버린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어제 일도 벌써 가물가물하다. 희끄무레해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내가 이룬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진다. 자괴감과 허무함이 밀려온다. 하지만 우리 모두 매일을 꿋꿋하게 채우며 살아오지 않았나? 분명 태어나서 오늘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출석 체크하며 살아왔는데 한 일이 왜 없겠는가.


이럴 땐 증거가 필요하다. 내 인생에도 무언가 있었다는 증거. 나도 꽤 괜찮은 인간이라는 증거. 그렇게 나를 설득할 수 있는 증거. 그 순간을 대비해 일기를 쓴다. 며칠이 지나면 잊어버릴 소소한 일상을 기록한다. 평범한 일상도 음미하다 보면 반짝이는 순간을 찾을 수 있기 마련이다. 별일 없는 하루도 쓰다 보면 이야깃거리가 된다. 별 거 없는 인생도 쓰다 보면 그럴싸해진다.


지난 일기를 읽어보니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내 36년도 무언가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좋은 일도, 슬픈 일도 모두 견뎌내며 오늘까지 왔다. 작은 일도 큰 일도 해냈던 내가 대견하다. 앞으로의 인생도 분명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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