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직장을 쉬게 되었다.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가족이 한 명 늘었을 뿐인데 생활비는 곱절로 드니 참 신기한 일이다. 수입은 줄고, 지출은 늘고 앞으로 수입이 늘어날지는 미지수지만 지출이 늘어날 것은 확실하다. 초보 엄마 역할도 버거운데 미래에 대한 불안감까지 나를 옥죄어 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다시 일할 수 있을까. 내 새끼 하나 못 먹여 살리면 어쩌지?
아이를 키우느라 집 안에만 갇혀 나날이 우울해지는 나를 위해 남편이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티켓.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지만 눈 딱 감고 가기로 했다.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
오랜만에 외출이다. 어느새 차가워진 바람에 코 끝이 시리다. 나의 계절은 여름에 멈춰있는데 세상은 어느새 겨울이 되었다.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콘서트 시작까지 시간이 빠듯하다. 아직 저녁을 먹지 못해 출출한 차에 지하철 역 바로 앞에 작은 떡볶이 가게가 보였다. 노점에 가까운 떡볶이 가게에서는 단출하게 떡볶이와 어묵을 팔았다. 몇몇 사람들이 테이블과 의자도 없이 주인장이 건네는 떡볶이와 어묵을 선채로 후루룩 먹고 있었다. 모두들 나처럼 콘서트에 가는 건가? 내 멋대로 상상하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떡볶이를 주문했다.
매콤 달콤한 떡볶이 소스가 혀를 감싼다.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으며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기다리고 있자니 행복감이 밀려온다. 그래!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나중에 할 일이 없으면 떡볶이를 팔면 되잖아. 떡볶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자 가장 즐겨먹는 음식이자 가장 잘하는 음식이다. 남편은 어묵을 데우고 나는 떡볶이를 만들고, 가게 얻을 돈이 없다면 푸드트럭부터 시작하면 되지. 떡볶이는 진짜 자신 있으니까. 떡볶이 때문인지, 곧 시작될 콘서트 때문인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막연한 용기 때문인지 행복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여행 짐을 쌀 때 나의 첫 번째 우선순위는 간편함이다.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어야 하니 예쁜 옷과 소품을 챙기는 일은 내 사전에 없다. 실용성만 따지면 여행 짐은 정말 간편해진다. 칫솔과 치약,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을 수 있는 뷰티 바와 올인원 로션, 스마트폰과 충전기 그리고 신용카드, 속옷 몇 장과 원피스 몇 벌이면 충분하다. 겨울이라 하더라도 입고 간 외투를 그대로 입으면 되니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에 사치를 부리자면 일기장과 펜 하나. 이 짐들은 가벼운 백팩 하나에 모두들어간다. 여행이 길어지더라도 빨아 입으며 되니까 짐을 늘리지 않아도 된다. (잘 마르는 옷으로 챙겨가면 더욱 좋다.) 이 짐가방으로 1박 2일은 물론 30박 31일도 가능하다.
(이 부분에서만은)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내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건은 이 정도다. 물론 집에는 물건들이 차고 넘치지만 필수 생필품만 따지면 그렇다. 이 짐들에 맞춰 살면 지금보다 작은 집도 괜찮을 것 같다. 지금보다 훨씬 적은 생활비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최소한의 삶의 무게를 재본다. 가볍다. 아이가 있으니 변수는 있겠지만 이 정도라면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나와 내 아이 정도는 책임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의 79%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고, 16%는 미리 준비하면 대처할 수 있다고 한다. 탄탄한 떡볶이 레시피를 준비하고 나에게 꼭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지혜를 갖춘다면 준비된 시련도 가뿐히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남은 5%의 확률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니 인간으로 태어나 이 정도 준비했으면 훌륭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걱정하지 말자. 다가올 일은 잘 준비해두고 걱정하지 말자. 불가능한 일은 어찌할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