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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hadi Oct 04. 2022

분명 나아지고 있다


내가 그렸던 그림들을 쭈욱 살펴보다가 처음에 그렸던 그림들까지 보게 되었다. 아...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해도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던 것을 진심으로 반성했다. 분명!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앞으로 일은 모르는 거야. 당장 내일 우리에게 멋진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이 달콤한 희망의 말에 속아 겁도 없이 결혼을 했다. 아니 속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남루한 청춘에게 반전은 있을 거라고.


얇디얇은 희망의 끈을 잡고 이리저리 휩쓸리며 청춘이라고 불리는 시절도 빛이 바랬다.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었지만, 그래도 차곡차곡 쌓아온 오늘이 어제보다 나아지고 있다. 개미 눈물만큼이라도 우리는 분명 나아지고 있다.


아무리 키를 내 손에 쥐고 있어도 인생은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바람은 늘 생각보다 거칠었고 일기예보는 자주 틀렸으면 곳곳에 알 수 없는 암초들 우리를 위협했다. 순간순간 불어닥치는 위기들을 아등바등 넘기고 정신을 차리면 예상치 못한 곳에 다다르기 일쑤였다. 바람의 방향을 파악하고 적당한 파도를 기다리며 우리는 최선의 플랜 B와 C, D를 짜내려 몸부림쳤고 낯설게 이어진 그 길을 새로운 항로에 새겨 넣었다. 우리의 여행은 여전히 기대에 못 미쳤지만 다행히 걱정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우리의 세계는 단단하게 넓어져갔다.


내 주민등록 초본은 두장을 훌쩍 넘어간다. 그만큼 이사를 자주 다녔다. 초본에 새겨진 흔적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어 내려간다. 평생을 여기저기 흘러가며 살아왔지만 지금 내가 어쩌다가 이곳까지 다다랐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별은 언제나 아픈 일이었지만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떠남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목적지를 내포하고 있으니 이별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한 때는 회한에 가까웠던 감정들에 약간의 설렘과 기대가 뿌려진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일들도 돌아보면 값진 무언가를 남겼다. 인생 굽이굽이에 남겨진 최악들도 지나가면 모두 그저 그런 일이 되어 나를 안심시켰다.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이 내 생각과 달랐듯이 예상치 못했던 곳이 내가 찾아 헤매던 그곳이기도 했다. 인생에 정답은 한 두 개가 아니니 어디를 가도 모두 정답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든 우리는 매일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찬찬히 뜯어보면 똑같은 날이란 없고 시간은 우리를 후퇴하게 두지 않았다. 찬찬히 뜯어보니 오늘의 나는 분명 어제보다 낫다. 우리는 매일매일 분명 나아지고 있다. 정신만 바짝 차린다면, 포기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앞으로도 항상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내 그림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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