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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순간

by pahadi


좋아하는 가수 브로콜리 너마저의 윤덕원님이 책을 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을 울리는 가사를 잘 쓰시는 분이라 작가로서의 작업들도 기대됐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책을 예약 구매했다. 오늘 주문하면 오늘 도착하는 시대에 열흘이나 기다려야 한다. 사실 그래서 더 좋았다. 이 설레는 마음을 열흘동안이나 간직할 수 있다니.

책인 만큼 출간기념 북토크가 열린다고 한다. 평일 7시 30분. 한창 아이를 돌봐야 할 시간이다. 어쩌면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그의 음악과 함께 한 아련한 나의 조각들이 떠올라 예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속한 날짜가 되자 어김없이 책이 배송되었다. 이런 다정하고 착실한 약속들 덕분에 그래도 살만한 게 아닐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확실의 세계에서 이런 확실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니 나는 행운아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우리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만들어 준다.

책의 제목은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 대충이라도 일단 하자는 뜻이다. 잘하고 싶어 차마 시작하지도 못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청춘의 쓸쓸함을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 <유자차>로 달랬고 희미해져 가는 인연의 그리움을 <보편적인 노래>를 들으며 흘려보냈다. 그 작은 선율들이 다정한 문장으로 이어져 낯선 나를 위로한다.

‘그렇게 버텨내고 나면 희미했던 시간도 사라지지 않고 무언가가 되어 남을 것이다’

- 윤덕원,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 중 -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 흘러 어느덧 북토크 날이 되었다. 가지 못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아이가 폐렴으로 입원했고 퇴원을 했지만 아이는 계속 엄마를 찾았다. 남편은 생계를 위한 회사 일로 바빴다. 요즘 잠을 설친 터라 내 컨디션도 바닥이었다. 북토크 장소는 멀고 멀었다. 그런데 그냥 가기로 했다. 가고 싶으니까.

지하철에서 남은 페이지들을 읽었다. 시끄럽던 마음이 고요해졌다. 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마음이 가벼워졌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조금 이기적이도 괜찮지 않을까. 다 잊고 나만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엎친데 덮친 격으로 슬프고 힘든 시간들이 이어졌다. 검은 그림자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잠식해 갔다. 지인이 스스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에 슬픔보다 부러움이 앞섰다. ‘이제 그만할 수 있으니 좋겠다.’ 하루하루 그저 견딜 뿐이었다. 변해버린 모습을 들킬까 봐 더 꽁꽁 숨었고, 숨을수록 나는 더 흉측해졌다. 헤아려보니 그런 시간이 다섯 손가락을 넘겼다.

그래도 나는 버텨냈고 시간은 나를 다시 이곳에 닿게 만들었다. 나를 막는 수많은 이유를 이겨내고 나만을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했다.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북토크가 시작됐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긴 터널이 끝났다는 것을. 내 두 발로 그곳을 지나왔다는 것을. 어둠의 시간은 새벽안개처럼 희미하게 사라졌다. 어려움은 언제고 다시 나를 찾아오겠지만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잘 헤쳐갈 수 있을 거라는 든든한 믿음이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윤덕원 님의 <유자차>를 불렀다.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로 가자.' 수천번을 들었을 이 가사가 오늘따라 마음에 오래 머문다. 이제 봄날로 가자. 산산이 흩어지는 순간 중 어떤 순간은 결코 잊을 수 없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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