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 <도토리 시간>
지난 토요일 퇴근길은 좀 어수선했습니다. 부쩍 해가 짧아져 벌써 어둑한 도로 위에서는 앞선 차들의 빨간 불빛이 이리저리 흔들렸고, 생각은 한 시간 전, 두 시간 전,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조금 전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죠. 아까 그 말은 하지 말걸. 그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조금 덜 힘들지 않았을까.
진전이 없는 듯한 시간을 마주하는 건 늘 괴로운 일입니다. 나아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제자리만 빙빙 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저는 작아집니다. 스르륵 작아져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고 싶어 져요. 작아진 내가 숨어서 하는 일은 대개 울적합니다. 자책과 후회로 만든 두꺼운 이불을 덮어쓰고 그 안에서 어두운 시간을 보내다 숨이 막혀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으면, 그제야 눈만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피죠.
식탁 앞에 팔짱을 끼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사람이 스르륵 작아져 방을 건너갑니다. 거친 빵의 계곡을 지나, 소란한 들판을 가로질러 만나는 것은 다람쥐. 커다랗고 복슬복슬한 꼬리를 내어 준 다람쥐는 작아진 사람에게 도토리 뚜껑을 열어줍니다. 도토리 안은 눈물도 그림자도 없고, 어둡지도 않아요. 그 대신 내가 혼자 머물 작고 소박한 방이 있고, 뒹굴거릴 너른 풀밭과 멍하니 보고 싶은 그림이 있습니다.
마음이 분주하고 어수선했던 지난 토요일 저녁, 이 책의 한 페이지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도토리 안에 들어가 하늘을 한참 바라봤어요. 흔히 볼 수 있는 하늘인데도 처음 보는 것 같았습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생각하다가 머릿속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작아질 때마다 꺼내 덮던 이불은 어둡고 무거웠는데, 도토리 안에 있는 동안은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