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6
토요일, 알바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아침에 나설 때만 해도 부모님의 당일치기 여행이 불확실해 보였는데, 7시가 조금 지나 차 조수석에서 고속도로를 찍은 사진이 카톡으로 왔다. 내가 일을 하는 동안 두 분은 여행을 떠나셨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최근 들어 편의점 알바의 고독함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무작정 카페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마 전 카페쇼 이후 과도한 카페인 섭취로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
하늘은 이미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후 비 예보는 5시에서 3시로 앞당겨졌다. 우중충한 날씨였지만, 집에서 혼자 있느니 피곤하더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이왕 나가는 김에 새로운 곳을 가보기로 했다. 다음 날 새벽 출근 때문에 너무 멀지 않은 곳을 찾다가, 평소 눈여겨봤던 카페가 떠올랐다. 커피 프렌즈에게서 '인싸 카페'로 추천받기도 했었다. 커피 스터디 모임을 자주 여는 카페 근처에 있었다.. 인스타그램과 커피 관련 유튜브 채널에서도 자주 보이던 곳이었다.
위치가 다소 애매했다. 버스에서 내려 15분 이상 걸어가거나, 환승을 해야 했다. 평소 그 방향으로 갈 일이 없어 자연스레 미뤄뒀던 곳이기도 했다.
홍대 거리를 지나야 했다. 지도를 봤음에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정보다. 예상외로 많은 인파와 버스킹 소리, 골목의 흡연자들 때문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지도 앱은 15분을 예상했지만, 서둘러 걸은 덕분에 버스 정류장에서 1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가 올랑 말랑 한 날씨였지만, 카페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안에는 다섯 명 벤치에 세 명 정도 앉을 수 있을 뿐이었다. 낡은 나무 테이블과 선반이 어우러진 작은 카페는, 오래된 음반의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공간이었다. 안에는 여러 음반 CD와 LP가 가득하기도 했다. 빛바랜 전구에서 쏟아지는 은은한 노란 조명이 아늑함을 더했고, 테이블 위에는 바쁜 하루의 흔적처럼 놓인 커피 서버들과 컵들이 느슨하게 흩어져 있었다. 바리스타들은 커피 머신들이 내는 낮은 진동과 함께 서두르지 않는 손놀림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런 작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행이 있었다. ‘인싸 카페’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작은 공간이라 필시 혼자 온 사람들도 있을 거라 짐작했는데 완전히 틀렸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일행이 많았다. 인싸 카페이기도 하지만 번화가인 홍대 근처라서 그런 경향이 더 있는 것 같았다.
손님들은 바에 앉아서 바리스타와 잔잔한 대화를 나누거나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의 순간에 몰두했다. 바에 가까울수록 단골이었고, 멀수록 외지인으로 보였다 인상이 보였다 서로 다른 삶의 조각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평온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이 공간은, 방문자들에게 일상의 작은 쉼표처럼 보였다.
이 안에서 나는 군중 속의 고독을 느꼈다. 혼자 온 사람은 오직 나 하나일 뿐이었다. 모두가 서로에게 속한 듯 보였다. 그 속에서 나 혼자만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대화, 웃음소리,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나에게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마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한쪽 구석에서 먼저 도착해서 음료를 기다리던 세 명의 일행이 핸드폰과 카메라를 들고 바에서 음료를 제조하고 있는 사장님과 직원을 찍었다. 앞서 말했듯 유튜브에도 이미 한껏 출연한 사장님은 작은 연예인 혹은 인플루언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소비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제품이나 서비스를 소비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험'을 소비하고, 그 경험을 디지털 기록으로 전환하여 또 다른 형태의 문화자본으로 축적한다. 카페에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이제 음료 그 자체를 넘어,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물이 되었다.
사장님과 직원들은 이러한 시선의 경제에서 자연스럽게 '인물'이 된다. 그들의 전문성과 기술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제 그것은 카메라 앞에서 더욱 빛나는 퍼포먼스의 일부가 되었다. 매일매일의 음료 제조가 하나의 공연이 되고, 그들은 무대 위의 배우가 된다.
바의 모든 순간들은 소셜미디어라는 거대한 전시장에서 전시되고 소비된다. 찍는 사람이 의도한 구도와 조명 아래에서 포착된 순간들은 디지털 공간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공유된다. 우리는 어쩌면 실제의 경험보다 그것을 기록하는 데 더 몰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소비문화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일상적 경험을 상품화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징후이기도 하다. 그리고 카페라는 공간에서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인물 혹은 공간이 ‘상품가치’ 지니고 방문한 고객에게 ‘경험’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조차 투명하게 느껴지는 나 자신이, 과연 이런 소비되는 경험과 기록 속에 어떤 가치를 줄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만드는 공간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고 기억될 수 있을까? 혹은 내가 이 과정 속에서 누군가에게 상품처럼 소비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 생각은 고독 속에 가라앉아 있던 나를 더 깊은 고립으로 몰아넣었다. 나 자신에 대한 불확실함과 이런 세상 속에서 나의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피어올랐다.
내가 만약 카페를 연다면 텅 빈 의자들이 나를 조롱할 것만 같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 한 장 없는 초라한 공간이 될지도 모른다. 내 동작은 어색해지고, 목소리는 떨릴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내리는 커피는 누구의 카메라에도 담기지 않을 것이다. 뜨내기손님이 가끔 들르더라도 그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할 것이다.
'여기는 뭔가 좀 부족해'
'사장님은 왜 저렇게 어색해 보이지?'
수군거림이 귓가를 맴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이미 나를 압도한다.
유명한 카페의 바리스타처럼 자연스럽게 미소 지을 수 있을까?
떨리지 않는 손으로 커피를 내리고 라테아트를 그릴 수 있을까?
소셜미디어에 공유될 만한 그럴듯한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동네 구석의 잊힌 카페로 남게 될까?
이런 생각들이 소용돌이처럼 몰려와 나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다.
찍고 찍히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나는 영원히 초라한 관객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카메라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나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