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던지는 작은 조약돌
"도심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야.” 메리는 이런 말도 흔히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메리가 말하는 것들은 실제로 자신이 느끼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풀잎은 노래한다’ 도리스 레싱, 민음사
여행 전에는 언제나 마음을 비운다. 다가오는 여행지의 사진도 굳이 찾아보지 않고, 본다 해도 기대는 지운다. 여행지를 화려하게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은 흔하다. 그렇게 기대감은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무너지질 수 있다. 현실은 사진과 다를 수 있기에.
그리고 사진으로 만들어진 선입견은 프루스트가 적었듯 경이로움을 줄일 수도 있다.
-이 점에 있어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 앞에 섰을 때 이미 사진을 통해 돔 지붕을 잘 안다고 생각하며 별 다른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나 또한 어리석었다.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권, 마르셀 프루스트, 민음사
스케치의 의미
스케치는 다르다.
스케치는 과장하지 않는다. 소박하고 인간적이다. 사진만큼 화려하지 않지만, 스스로의 손으로, 단 몇 줄의 선만으로도 표현이 가능한 마법이다.
자신의 여행을 기억하는 수단으로써, 사진은 어딘가 부족하다.
찍고, 돌아선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의 행위가 있을 뿐, 대상에 대한 그 자리에서의 성찰은 과정의 짧은 시간만큼 줄어든다.
그와 다르게, 스케치는 눈앞의 대상과 주고받는 대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는 순간 요구되는 집중과 관찰의 행위는,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만큼 그 순간의 경험에 깊이를 준다.
그리고 그 깊이만큼 추억의 흔적은 마음에 오래 새겨진다. 일 분이 안 되는 짧은 스케치 과정에서도 사진에서는 쉽게 지나치는 디테일을 재확인하게 된다.
손으로 직접 그리는 행위 자체로부터 다른 종류의 기억을 새기게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별 계획 없이 혼자 즉흥적으로 떠난 두 달의 첫 유럽 여행. 그때 처음으로 여행 중 스케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리기 귀찮으니 내 마음속에 새겨두자, 하고 여행의 피로만큼 게을러진 마음에 어느 순간 스케치를 흐지부지 그만두었다. 그만큼 여행의 세밀한 기억은 흘러 사라졌다.
여행 스케치는 누구에게나 시작이 쉽다.
펜과 종이만 있으면 ok.
남에게 보여줄 용도로는 사진으로 충분하다.
사실 ‘타인’이 주어라면 낯선 여행을 설명하기에는 사진이 훨씬 낫다.
하지만, 여행 스케치는 나만의 그림일기이다. 선이 가는 데로 내버려 두는, 흥에 겨운 손놀림에 가깝다. 어떠한 심적 압박도 없이 -눈앞의 맛난 음식이 식을까 봐 속도가 빨라질 수도 있지만- 가볍게 펜을 들고 낙서처럼 끄적거리면 된다.
스케치는 평범한 일상조차 나만의 작은 의미로 바꾼다. 타인과 같은 장면을, 같은 구도에서 그려도 결코 같은 결과는 없다.
사진은 한 장면을 가감 없이 전부 보여주지만, 스케치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부분만을 나만의 선으로 그린다.
즉, 스케치는 자신의 눈과 손을 통하여,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자유로운 마크 marks, ‘나만의 작은 흔적’이다.
그 작은 흔적에서 자신만의 시점을 깨닫기도 한다.
스케치의 시간, 여행자는 자기 자신과 무언의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을 이해하고, 더 가까워지기도 한다.
여행은 떠남이다. 하지만 그 끝자락이 자기 자신과의 만남과 이해에 닿아야 진정한 여행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