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ysleeper Jan 18. 2019

오늘의 음악 : Let her go-Passenger

애써 잡으려 할수록, 더 힘껏 도망가버리는 것들.

일러스트 by @napping_chronicler


오늘의 당신.

애써 잡으려 할수록, 더 힘껏 도망가버리는 것들.


이번 주말엔 며칠 동안 기승을 부리던 미세먼지가 한풀 꺾였다.

-

내일이면 도망가버릴지 모를 깨끗하고 따듯한 날씨에 친구와 약속을 잡을까 싶어 핸드폰을 들었다가,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잔뜩 밀려있는 단톡방을 보고 사이드 테이블에 그대로 다시 내려놓았다.

-

매트리스 커버에는 어제 기절하듯 잠들어 지우지 못한 화장이 숙취의 흔적처럼 고스란히 자국으로 남아있었다. 이쯤 되니 밤새도록 들이켠 술이 며칠째 이어지는 불면증에 스스로 내린 합리적인 처방이었는지, 단순한 불금의 여흥이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빨래통을 털고 침구를 모두 챙겨 동네 코인 세탁소로 나왔다. 하얗게 돌아올 침대 커버가 마치 면죄부라도 되는 것 마냥, 흔쾌하게 울릴 세탁 완료 멜로디가 괜스레 기다려졌다. 건조까지 마치고 보니 베개와 이불이 내 기분처럼 우스꽝스럽게 더 빵빵해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매트리스 커버만 간신히 씌우고 이불과 베개를 뭉개듯 드러누워 버렸다.

-

한층 뽀송뽀송해진 베개가 오히려 너무 높아 편치 않아, 머리맡에서 끌어내려 다리 사이에 끼고 매트리스 위에 화장기 없는 얼굴을 조심히 묻었다. 가을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직은 이르게 느껴지는 겨울의 향. 침대에선 섬유유연제의 친숙한 시트러스 향이 났다. 그대로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불면증을 핑계로 요 며칠 애꿎게 술만 들이켰는데, 어쩌면 불편한 베개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밤에 찾아올 불면증이 두려워서 어렵게 몸을 일으켜 그동안 미뤄왔던 아기자기한 묵은 일들을 처리했다. 따듯한 물로 목욕하고 손톱을 다듬고 식탁 바구니에 담겨있던 감귤을 세 개나 까먹었다. 해장하지 못한 속은 여전히 시큼함에 쓰리고, 짧게 자른 손톱엔 기분 좋은 상큼함이 뱄다.

-

무심히 틀어놓은 TV에서 다음 주부터 꽤 추워진다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직은 멀다고 생각했던 겨울 냄새, 이르게 느껴졌던 침대 위 겨울의 향이 내 곁에 한층 가까이 다가옴을 느꼈다. 내일이면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따듯한 가을 날씨가, 자려고 눕기만 하면 사라져 버리는 졸음처럼 그렇게 정말 떠나가버린 순간이었다.

-

가는 김에 미세먼지도 함께 데려가 주길 바라며, 굿바이 불면증, 굿나잇 오늘은.


일러스트 by @napping_chronicler


오늘의 음악.

Let her go - Passenger.


노래 가사 그대로 빛이 희미해질 때에야 불빛을 필요로 하고,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쯤에야 햇살을 그리워한다.

-

우울할 때쯤에야 지금까지 행복했음을 깨닫고, 관계가 끊어진 후에야 서로가 소중했음을 안다.

-

계절도, 상황도, 관계도, 꿈도 모두 마찬가지. 바라는 많은 것들이 대부분 느리게 왔다가 빠르게 지나간다. 이미 알고도 애써 모른 척 외면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잡으려 할수록 더 힘껏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떠나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고 뒤늦게 잡으려 했음을.




오늘의 당신은 어떤 기분인가요? 나로 대변되는 우리의 일상에서 당신의 기분을 헤아려봅니다. 여러분의 지나간 사연이 누군가에겐 현재의 모습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밥을, 옷을, 공간을, 곡을 때로는 한숨을 가지고 당신의 글을 짓습니다.

이전 01화 오늘의 음식 : 만두&샤오롱바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