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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Sep 29. 2022

다시 가드를 올린다

고정순 작가의 그림책 [가드를 올리고]

권투를 아시나요?



지금 어린아이들은 권투, 혹은 복싱이라는 경기 자체를 아예 모르지 않을까 싶다. 학교 체육시간에 해보는 것도 아니고 매체에서 중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축구나 야구처럼 대규모 이벤트가 있는 것도 아니다. 혹시 알더라도 다이어트 운동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어릴 때는 무슨무슨 타이틀 매치라면서 텔레비전에서 종종 권투 시합을 중계해줬고, 그때마다 열심히 응원하는 아빠 옆에서 같이 봤다. 지금 내 책상위의 모니터 보다 작은 흑백텔레비전 앞에서 두 선수가 치고 박고 싸우는 장면을 마음 졸이며 지켜보았다. 그때는 눈이 붓고 때로 피도 나고 맞아가며 경기하는 모습이 무섭기도 했지만 공이 울리면 양 끝에서 두 주먹을 팡팡 치면서 경기장 중앙으로 나오는 선수들의 기백에 감동해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마주 잡고 봤었다. 예닐곱쯤이거나 초등저학년일지 정도의 나이였을 것 같다. 하지만 자라면서는 무서워서 권투시합을 보지 못했다. 88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선수의 경기장면을 다시 보여줄 때도 권투 장면은 보기 힘들어했고, 지금도 액션영화를 잘 보지 못한다.     


그런데 권투선수가 나오는 그림책이라니.      


[가드를 올리고] by 고정순

 

아무도 없는 링 위에 빨간 글러브를 낀 남자가 올라오고 시합은 시작된다. 곧 두 선수 간의 난타전이 벌어진다. 코너에 몰리는 남자는 얻어맞고, 넘어지고, 포기할까 망설이고, 한 걸음도 못 내딛겠는 상황에 몰린다. 하지만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서도 남자는 아무도 없는 모퉁이 끝에서, 계속 싸울 준비를 한다. 최소한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고독한 링 위. 산 정상에서 불 바람을 기대하며 그는 다시 가드를 올렸다.      


검은 목탄으로 거칠고 둔탁하게 채운 화면은 어릴 때 보던 텔레비전 중계화면을 닮았다. 파란배경과 남자가 낀 빨간 글러브만이 보이는 색의 전부다. 그 속에서 화면을 압도하듯이 주먹과 주먹이 부딪힌다. 마지막 장에 가서야 드러나는 얼굴은 여기저기 부어있지만 어쩐지 웃는 것처럼도 보인다.


작가는 뒷표지에 ‘때때로 나를 일으켜 준 이름 모를 권투 선수에게 이 책을 보낸다. 오늘도 일어서는 당신에게도’라고 적었다. 그에게 승리는 상대를 때려 눕히는 것이 아니라 산에 올라 바람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또 다른 산문집 제목을 [그림책이라는 산]이라고 짓지 않았을까.          



다시 가드를 올리고-

월요일을 준비해야하는 일요일 오후에 어울리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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