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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Oct 11. 2022

부러움과 질투의 차이

부러우면 지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내세울 것 하나 없던 나는 친구들의 부러움이나 질투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럴 일이 없었다. 흔한 얼굴에 모난 성격, 평균보다 못한 경제력을 지닌 집에서 자랐는데, 남들이 나를 부러워할 점이 당췌 있을리가.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지난 기억을 떠올려보니, 단 한 번 타인이 보내는 강렬한 시샘을 경험한 일이 생각났다.



첫 애 만삭 무렵이었다. 나보다 훨씬 먼저 결혼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 오래 노력하던 대학 동기와 저녁 약속을 잡았다. 서로 사정이 안되어 한동안 못 만나고 있었는데 곧 출산을 앞둔 나를 축하해주기 위해 부러 시간을 낸 거였다. 그간 잔뜩 쌓인 얘기를 나누고 자리를 옮기는데, '내 앞에서 꼭 그렇게 배를 내밀고 걸어야겠어?'하고 친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순간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멈칫했고, 곧 아무렇지 않게 친구가 다음 말을 꺼내며 대화가 이어졌다. 이후 만남은 순조로웠지만, 그 순간의 냉랭한 말투와 선명했던 적의는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쥔 상대를 향해 가지기 쉬운 감정은 선망보다는 분노였던 것이다.


아주대 심리학과 김경일 교수의 강연 중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구절이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감정, 부러움과 질투에 관한 얘기였다. 둘의 차이점을 설명하는데 아주 명쾌했다.


"부러움은 내가 상대처럼 되고 싶은 감정이고, 질투는 상대가 나처럼 되길 바라는 감정이다."


그러니까, 내 브런치 글이 메인에 걸린 글들처럼 라이킷과 조회수, 구독자가 많아졌으면 좋겠는 것은 부러움이고, 메인이 있는 글들이 내 글처럼 조회수 20 정도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는 것은 질투라는 것이다.


그럼, 그 당시 만삭인 내게 냉랭한 말을 뱉게 했던 친구의 감정은 부러움이었을까, 질투였을까?



부러움과 질투의 밑바닥에는 '비교'가 있다. 나와 남을 비교하고, 끝임없이 타인을 의식하다보면 자연스레 열등감에 익숙해진다. 나보다 잘하는 상대때문에 생기는 열등감은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긍정적인 작용도 하겠지만 인간관계를 갈라놓을 만큼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십대 때는 종종 친구들과 '부러우면 지는거다'라는 말을 나누곤 했다. 미모가, 몸매가, 재능이, 집안이, 재력이, 남자친구나 배우자가, 좋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많이 가진 친구가 부럽고 내게 없는 것을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쉽게 부럽다고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정말 내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내가 가진 것이 이것 뿐이라고 고백하는 것 같아서, 아닌 척 하고, 안 부러운 척 하고, 없어도 상관없는 척을 했다. 사실 그땐 모두들 그랬다. 누구도 부럽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서로를 부러워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다들 알았다.


삼십대와 비교하면 이십대의 부러움과 질투와 차라리 소박했다. 스무살에는 언젠가는 내가 노력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니까.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을 하고 공부를 하고 돈을 모으면 원하는 모습에 근접할 줄 알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순간,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달라진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남편의 연봉이 바뀔 수 없고, 네다섯살 부터 사교육을 쏟아붓는다고 자식이 영재가 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는 영역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투는 건강한 도전정신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을 갉아먹으며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남편과 갈등과 다툼도 늘었고 우울과 대인기피도 경험했다. 남들과 비교되는 내가 너무 초라해서 관계를 끊기도 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터질 것 처럼 끓고 있는 마그마 같은 삼십대였다.


들끓는 삽십대를 지나 사십대가 되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이제 나는 질투가 생기기 전에 웃을 수 있는 사람, 부러우면 부럽다고 선선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부럽다'고 말하며 웃는 나를 보고 어느 지인은 '그릇이 크다'고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겉으로는 손사래 치며 속으로는 웃었다. 내가 정말 그릇이 커서 질투를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뿐이다. 아마 '해탈'이 아니라 '포기'에 가까울거다. 내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겸손이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지만, 그러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할 수 없지 뭐. 그럴 수도 있는거지.' 라는 마음으로 바뀌는 순간, 솔직하게 부러움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중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질투와 부러움에 몸이 닳는다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고 있을까. 내 상황을 변화시킬 순 없지만 내가 바뀔 수는 있었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소망을 하나쯤 더 갖게 된다. 부러워하는 것도 나고, 부러워하고싶지 않은 것도 나다. 지금의 자신을 긍정하고 나니 끓어 오르던 마그마가 천천히 식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식어 이제는 단단한 암석이 되었다.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 나는 내면의 안정과 소소한 행복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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