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헌혈을 할 수 없답니다.

헌혈, 해보셨나요?

by 피어라

헌혈을 좋아합니다. 내몸에서 빠져나간 피가 다른 사람을 살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기쁩니다. 굶어서 다이어트도 한다는데, 솔직히 영양과다 체중과다인 제 몸에서 조금이라도 피를 빼내 남을 도울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닐까요?


위화의 소설 [허삼관매혈기]에서처럼 피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잔뜩 먹고 소파에 편히 앉아 쉴 수 있습니다. 제가 헌혈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편안하고 깨끗한 헌혈의 집에서 문진하며 내 건강상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피검사를 먼저 하거든요.다 무료입니다. 심지어 헌혈을 마치고 잠시 쉬고 있으면 선물까지 챙겨줍니다. 거룩하고 숭고한 이타심이 아니라 내 한 몸 위한 이기심에서라도 헌혈은 자주 할 만합니다. 진짜입니다.


이미지출처 : 언제나 픽사베이


젊을 때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헌혈을 했습니다. 몸 상태야 몇 번이라도 더 할 수 있겠지만, 부러 시간내서 찾아가야 하고, 주사나 약물, 음주하지 않은 상태여야 하는 등 사실 조금 제약이 있어서 마음처럼 자주 갈 수가 없었어요. 헌혈의 집이 집 앞에 바로 있는 것도 아닌지라 시간을 내야하는 것도 이유겠지요.


결혼을 하고 임신과 출산, 육아를 거치는 동안에는 헌혈을 할 수 없었습니다. 피곤에 절어 내 몸 챙기기도 힘들었으니까요.


아이를 조금 키워놓고 나서야 다시 헌혈을 할 수 있었어요. 그때는 초등 고학년이 된 아이들을 데리고 같이 갔습니다. 헌혈의 의의도 얘기해주고, 더 자라서 건강한 성인이 되면 함께 헌혈에 동참하면 좋겠다는 의미였지요. 물론 초코파이와 핸드폰에 빠진 아이들이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두어 번 하고 난 다음일 겁니다. 코로나로 헌혈자가 급감해서 혈액이 많이 부족하다는 혈액원의 문자를 받고 헌혈하러 나섰습니다. 위험지역에 간 적 없고, 건선치료 받은 적 없고, 먹는 약물 없고, 전 날 음주 하지 않았고. 오케이, 문제없어. 날짜 맞춰서 헌혈 하러 갔지요.


문진하고 손가락 끝을 바늘로 찔러 검사를 했는데, 부적합 판정을 받았어요.


"저런 요즘 피곤하셨나봐요. 오늘은 못 하시겠어요."

"네, 왜요? 설마 빈혈인가요?"


빈혈은 아니지만, 딱 내 몸에 쓸 만큼의 철분만 있다더군요. 남에게 나눠줄 만큼은 안된데요. 다른 건강상의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 노화로 인한 거라더군요. 나이들어서 나눠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네요.


돌아오는데 많이 서글펐습니다. 늙었다는 공식적인 선언, 확증이라도 받은 것 같았어요. 마치 정부에서 새로 만든 '늙었음' 신분증이라도 받은 기분이랄까. 빈혈도 없고 건강하고 튼튼해서 기쁘게 헌혈에 동참했었는데, 돈과 시간을 들인 봉사는 못해도 있는 것 조금 나누는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나름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못하게 됐구나 싶어서 너무 아쉽고 속상했습니다. 하고 싶어도 못하다니, 좀 더 젊을 때 열심히 할껄, 더 많이 해둘걸, 하는 아쉬움도 컸고요.


나이들어 못하는게 어디 헌혈뿐이겠습니까. 여행이며 스포츠, 등산에 공예, 섹스까지. 몸이 따라주지않아 할 수없는것들이 점점 많이 생깁니다. 언제부터는 이것을 못하고 이때부터는 저것을 하지 못한다고 미리 알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리트머스시험지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있다면 미리 대비할 수있을텐데 아쉽게도 불가능한 상상일뿐이네요.


그러니 아직 내 마음속 철분이 여유있다면, 할 수있는 것들을 맘껏 해봐야겠습니다. 지금 가능한 일들을 열심히 찾아보면서요. 내게도 유익하고 남들에게도 도움이되는, 헌혈같은 일이면 참 좋겠습니다.


아, 기회되면 헌혈의 집에 꼭 한 번 들러보세요. 생각보다 편안하고, 재미있고, 또 보람있답니다. (요즘엔 선물도 엄청 다양해요! 소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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