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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Oct 30. 2021

유통기한 지난 믹스커피를 마셨다


믹스 커피 두 봉지를 한 꺼번에 컵에 털어넣는다. 늘어진 뱃살 때문에 믹스커피는 하루 한 잔이 목표인데 아침부터 두 봉을 한 번에 먹는 사치를 누리다니. 가만가만 커피를 저은 후 빈 봉지를 바라본다.유통기한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 2020.7.13 ]




어머님은 믹스커피를 안 드셨다. 카페인에 약하시기도 하거니와 당뇨 때문에 진한 설탕이 매력인 믹스커피는 질색 하셨다. 결혼 초 어머님 집에 갈 때면 밥을 먹고 난 다음 달달한 믹스커피가 땡겨도 마실 수가 없었다. 찬장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않는 믹스커피를 그리워한 다음부턴 아예 집에서 챙겨들고 시댁으로 향하고는 했다. 그랬는데,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어머님 집에 믹스커피가 한 상자 놓여있었다.

“어머니, 왠 커피에요?”

“누가 줬는데 버리지도 못하고 뒀다. 너 가져갈라냐?”

“아니에요, 여기 두고 저 올때마다 먹음 되죠. 그냥 두세요. 저 집에도 많아요.”

병원 모시고 갈 때나 음식을 해 들고 갈때나 하나씩 타먹던 믹스커피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세 달이 지나 어머니는 자신의 삶의 기한을 다 마치셨다.




혼자 남은 아버지에게 달에 두번 정도 찾아간다. 형님네와 번갈아 주말에 찾아가 아버님과 함께 점심을 먹고, 달에 한 번은 청소를 해드린다. 벌써 10달이 되었다. 지난 주에는 시골에서 사촌누님이 생선을 보내주셨다며 가져가라고 아버님이 부르셨다. 생선을 꺼내 담을 지퍼백을 찾으려고 찬장을 열었는데, 찬장 안 물건들이 어머니 살아계실 적과 같은 위치에 고대로 있었다. 사람만 없고, 제 위치에서 그대로 숨쉬고 있는 부엌살림을 보고 있으니 안계신 어머니가 생각나서 서둘러 찬장문을 닫아버렸다. 서랍도 닫으려는데 노란 믹스커피가 한 줌 눈에 띄었다. 내가 먹겠다며 남겨두라고 했던 그 믹스커피다. 옆에서 보던 남편이 집어들고 한마디 거든다.

“아버지, 커피 드세요?”

“아냐, 이거 내가 먹겠다고 남겨뒀던거야. 이리 줘봐, 한 잔 마시게.”

남편에게서 커피를 건네받고 봉지를 뜯으려는데, 겉봉에 새겨진 검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유통기한 2020. 7.13.]


이미 몇 달이나 지나버린 유통기한. 아무도 먹지 않는 커피가 서랍 안에서 시간과 함께 묵혀있었다. 여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서랍.

“아버지 안드시면 이거 제가 챙겨가서 먹을게요. 집에 커피 떨어졌는데 잘됐네요.”



우리 집에 유통기한 지난 믹스커피가 한 묶음 생겼고, 오늘 아침도 두 봉을 한 번에 타서 마시고 있다. 지났어도 맛의 차이도 모르겠고, 두 어번 마셨는데 멀쩡한걸 보니 마셔도 괜찮은건 확실하다. 진공포장된 믹스커피는 유통기한이 지났어도 그대로 존재하는데, 사람은 삶의 유통기한이 지나면 사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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