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아픈 이유

효, 도를 아십니까

by 조유리

아버지가 엄마를 직접 돌보는 일을 맡으셨다면 병원에 모시고 가고 요양 기관들을 알아보며 그들과 소통하는 것은 거의 나의 몫이었다. 그 과정에서 오빠와 많은 상의를 했고 그럴 때 형제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힘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엄마와 동성이고 친정과 더 가까이 살았으며 프리랜서로 일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도와 엄마를 챙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건 사실이다. 일이 항상 바빴던 오빠는 내 보고(?)를 받고 같이 결정하는 일을 주로 했다.


여건이 되는 사람이 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며 큰 불만이 없던 나도 가끔 일을 진행하며 외로움을 느꼈다. 요양원과 상담한 내용을 오빠에게 전하는데 그 자리에 없었던 오빠가 내용의 미묘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오빠도 같이 돌아다니며 상담도 같이 하면 좋을 텐데.’라며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전달할 대상이 없었다면, 상의를 안 하고 내가 혼자 결정해야 한다면 외로움과 답답함이 덜했을 것 같았다.


흔히들 부모에 관한 큰일을 치를 때면 형제가 많이 있어야 든든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부모님이 병원에 드나들 일이 늘어나는데 형제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자꾸 자신에게 일을 떠맡긴다고 불평하는 지인이 있었다. 혼자였다면 당연하다 생각했을 일도 다른 형제도 있는데 나만 한다는 생각에 억울한 느낌이라고.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엄마 관련 일을 나만큼 하지 않는 오빠로 인해 느낀 서운함과 답답함, 외로움을 나는 오빠에 대한 부채감으로 지워 냈다.


초중등 시절, 다른 친구들의 남매 관계를 보며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친구들은 자기 오빠에게 반말도 하고 가끔 발로 차며 투닥거리고 지내던데, 오빠와 그만큼 이물 없이 지내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반면 나의 오빠는 어릴 때부터 무척이나 권위적이었다. 부모님이 허용하시는 일도 안된다고 말하며 ‘엄마 아빠가 그렇게 오냐오냐 하니까 애가 이렇잖아요!’라며 항의하곤 했다. 그리고 내가 오빠에게 한 번이라도 따지고 들면 ‘너 오빠에게 감히!’ 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현실 남매 사이에서 다정다감까지는 바라지 못해도 세 살 위 오빠가 좀 더 편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학창 시절 내내 하고 살았다.


오빠에게 일말의 애틋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였다. 엄마, 아버지가 한창 새벽 장사를 하시며 남매 둘만 집에 남겨두고 일을 나가던 우리의 유아기 시절, 아마도 오빠에게는 항상 ‘네가 동생을 잘 돌봐야 한다’는 부모님의 단속이 주어졌을 것이다. 원래부터 원칙주의적인 성격에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짐을 짊어지는 책임감 있는 오빠를 생각하면 그 작은 아이가 엄마, 아빠 말씀을 상기하며 동생을 돌보는 책임에 얼마나 긴장했을지 나는 두 아이를 낳고 나서야 감히 짐작했다. 그리고 그때 느낀 오빠에 대한 미안함과 부채감은 20여 년 후 내가 엄마를 돌보며 서운해했던 오빠에 대한 감정을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부모가 아프기 시작하면 형제들 간 눈치 게임이 시작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들 먹고살기 바쁜 세상, 일상과 일을 제쳐두고 부모 돌봄에 신경 쓰는 건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부모 자식 사이뿐 아니라 자식끼리도 평생 가족으로 살아온 복잡 미묘한 감정이 있다. 각자의 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며 남 같이 살아온 시간 동안 정체되었던 그 감정이 부모의 병환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서로 일을 미루고 상처 주며 할퀴는 과정이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한 부모의 자식임을 깨달으며 문제를 풀어간다. 결혼 후 각자의 삶을 살며 데면데면하던 오빠와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엄마가 아프고 나서다.


어쩌면 자식들에게 형제임을 잊지 말라고, 당신들이 없어도 형제끼리는 가족임을 상기하고 잘 협조하며 살아야 된다고 말하기 위해 부모님이 늙어가는 길이 그렇게도 다사다난한 건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에 이유가 없는 것은 없을 것이다.

keyword
이전 10화방문 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