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까지 날아가 듣고 온 팩폭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반드시 외노자가 되겠다고 삽질을 하던 중, 하루는 회사 실장님의 지시로 한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글로벌 여행 기업 싱가포르 지사와의 업무 제휴 회의였는데, 당시 사원 나부랭이 었던 저는 회의실 가장 뒷자리에 숨 죽이고 앉아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회의록을 작성하라는 임무를 받았죠.
그때 싱가포르 쪽 대표로 오신 분은 영어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시는 분이었는데, 해외 취업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고 있던 저는 그분이 두 언어를 넘나들며 능수능란하게 회의를 이끌어가는 모습에 크게 감명을 받게 됩니다.
그 왜,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에서 성공한 직장인 캐릭터를 묘사할 때, 꼭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장면이 등장하잖아요.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뒤 외국인들에게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고 살짝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카메라가 fade out…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 당시의 저에게는 바로 그게 ‘해외 취업에 성공한 글로벌 인재’의 이미지였어요. 그리고 그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분을 실제 업무 현장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거예요.
그때 저는 한창 해외 취업 정보를 여기저기서 긁어모으고 있었고, 동서양이 만나는 APAC 중심지인 싱가포르가 미국(샌프란시스코ㅠㅠ)이나 유럽보다 여러모로 현실적으로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제 상상 속 이미지처럼 일하고 계신 분을 직접 보니 마음이 더욱 기울게 되었죠.
몇 개월 후, 저는 용기를 내어 그분에게 이메일을 보냈어요.
‘0월 0일 00 회사 00 회의에 있던 줄리인데, 그날 하신 프레젠테이션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해외에서 일하는 것이 꿈인데, 현직에 계신 분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음 달에 싱가포르로 답사 겸 여행을 갈 예정인데, 귀한 시간을 내주신다면 찾아뵙고 조언을 구하고 싶다.’
... 가 이메일의 주요 내용이었는데, Chat GPT도 없던 시절,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함을 한 자 한 자에 꾹꾹 눌러 담은 아주 길고 정성스러운 이메일이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특히 글로벌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LinkedIn으로 연락해 캐주얼하게 커피챗 약속을 잡는 게 그리 드문 일이 아니긴 해요. 하지만 그 당시 한국 직장인 패치가 제대로 깔려있던 저는 제 직속 상사와 업무 제휴 중인 타 회사의 부장님에게 업무 외적인 이유로 연락하는 것이 마치 대역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져 한참을 고민했었어요.
다행히 그분은 흔쾌히 시간을 내어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에 있는 오피스로 저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3박 4일의 싱가포르 답사 겸 여행 둘째 날, 저는 드디어 상상만 하던 ‘다국적 기업 글로벌 오피스’를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만 있는 경직된 회사에서 한국어로만 일하던 저에게,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영어로 자유롭게 대화하며 일하는 모습이 어찌나 신기해 보이던지. 한동안 정신이 홀린 듯 구경을 했어요. 오피스 투어가 끝난 후 커피챗 시간이 시작되었고, 여러 질문과 대답이 오간 뒤 그분이 물으셨어요.
“줄리 씨는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했죠?”
“전략기획팀에서 합작법인 업무, 시장 조사 및 경쟁사 분석 등의 업무를 하고 있어요."
“싱가포르에서 일하게 된다면 현재 직무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나요?”
글로벌한 환경에서 일하는 게 꿈이라면서 한국에서 싱가포르까지 날아와 제 발로 찾아온 사람에게 던질 만한,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세상 자연스러운 질문에 세상 당황스러운 압박면접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버벅대기 시작했습니다.
“기획 직무가 저에게 잘 맞긴 한데… 음… 아무래도 언어와 현지 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중요한 직무이다 보니 싱가포르처럼 글로벌한 환경에서도 잘 해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음… 아직 경력이 길지 않아서 새로운 직무에도 열려 있긴 하구요…”
“어떤 다른 직무를 생각하고 있죠?”
“음…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기획팀 경험을 바탕으로 수치로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마케팅도 해볼 수 있을 것 같고, 기획력과 창의력이 필요한 PR도 해볼 수 있을 것 같고… 그리고…”
아는 문과 직무 다 늘어놓을 기세로 횡설수설대는 저에게 그분이 말씀하셨어요.
“줄리 씨는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인 것 같아요. 여기까지 찾아온 용기와 열정만 봐도, 무슨 일이든 맡기면 잘 해낼 것 같구요. 흠... 하지만, 아직 본인이 뭘 하고 싶은지 명확히 모르는 것 같네요. 내가 이쪽 회사에 추천서를 써주고 싶다고 해도 어느 방향으로 써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본인이 잘 모르니까요.”
팩. 폭.
너무나 맞는 말이었어요. 저는 당장 아무 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해외취업이 꿈이라면서 정작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저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어요.
말을 잇지 못하는 저에게 그분이 말씀하셨어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이죠. 그래도 한국을 떠나서 커리어를 쌓고 싶다면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걸 추천해요. 여긴 한국처럼 한꺼번에 신입사원을 뽑은 후에 회사가 알아서 적당한 팀으로 배치해 주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거든요. 본인이 뭘 하고 싶은지 본인이 모른다면, 누구도 도와주기 힘들 거예요. 일단 LinkedIn 프로필부터 만들고, 돌아가서 잘 고민해 봐요. 응원할게요.”
감사하다는 인사를 수십 번 하고 빌딩을 나온 후, 저는 정처 없이 마리나 베이 주변을 걷고 또 걸었어요.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어느덧 해가 지고 있더라구요.
다음 날 리틀 인디아에서 오리엔탈 로티를 먹으면서도, 센토사 섬에서 피크닉을 하면서도, 호커센터에서 칠리 크랩과 카약 토스트를 먹으면서도, 저는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한국으로 돌아오는 레드아이 비행기 안에서, 큰 결심을 하나 하게 됩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