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지나간 자리
"... 예전엔 설계를 시작할 때마다 무언가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요즘은 모르겠다. 뭔가를 세운다는 게,
꼭 무언가를 밀어낸다는 느낌도 들어서.
그래서일까.
이런 작은 찻집에 오래 앉아 있으면 괜히 안도감이 든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있다는 것."
삼척은, 생각보다 조용한 곳이었다.
바람이 많은 동네.
겨울이 끝날 무렵엔,
그 바람이 바다를 반쯤 말려놓는다.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더 시끄러울 줄 알았지만,
바다는 늘 먼 곳에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회색 재킷에 마른 먼지를 털며,
해안도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숙소 창문을 열면 파도가 아니라,
파도가 지난 자국이 먼저 들어왔다.
출장 이유는 간단했다.
-폐기 예정인 해안 구조물에 대한 실측 자료 수집.
-오래된 방파제 구조물 조사였다.
마모 상태, 콘크리트 균열, 철근 노출.
사실 중요한 건 아니었다.
여느 도시의 도시계획안에 참고용으로 들어갈 자료 몇 줄을 채우기 위한 방문이었다.
어디선가 다시 쓰일지, 영영 묻힐지 모를 기록.
그런 일들을 나는 요즘 종종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종류의 일,
해결사*의 일이다
실측은 오전에 끝났다.
대충 실측하고,
사진 몇 장 찍고.
해가 기울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이후엔 갈 곳도 없고,
딱히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요즘은 대부분 그렇다.
언젠가부터 사람들과 말하는 게 피곤해졌다.
건축이라는 일이 본질적으로 사람을 위한 일이긴 한데,
그게 자꾸 부담으로만 느껴졌다.
벽 하나 세울 때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감정들을 다 책임지는 기분이 들었다.
길을 걷다 낡은 찻집을 발견했다.
간판은 많이 바랬고,
‘해유茶房’이라는 글자가 겨우 읽혔다.
'해유'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사투리일 수도,
아니면 그냥 붙인 이름일 수도.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이유 없이 오래된 것에 끌릴 때가 있다.
유리문엔 하얀 종이에 손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녹차, 둥굴레차, 매실차 / 오후 6시까지”
문을 열자 작은 종이 울렸다.
가게 안은 비어있었다.
가게 안은 따뜻했다.
바깥보다 두 계절쯤 느린 온도.
벽 쪽에는 오래된 턴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바닥은 삐걱거렸다.
테이블은 네 개.
의자는 다섯 개.
벽에는 90년대 재즈 CD들이 꽂혀 있었다.
가게 구석에는 서랍장 위에 낡은 포트와 찻잔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창가에는 나무 의자 두 개.
그중 하나에 앉았다.
조금 뒤,
주인이 나왔다.
회색 카디건에 낡은 슬리퍼.
청바지를 입은
60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말수가 적어 보이는 얼굴.
머리는 희끗했고, 눈동자는 조용했다.
“차 드릴까요.”
"네,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오늘 같은 날엔 녹차가 무난하죠"
“네, 녹차 부탁드립니다.”
그는 고개만 끄덕이고 조용히 돌아갔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크지 않은 만(灣).
잔잔하고,
유난히 푸르렀다.
겨울 바다는 격하지 않았다.
잔잔했고,
바람도 거의 없었다.
하늘은 뿌옇고,
햇빛은 짧았다.
차가 놓이고,
나는 감사 인사를 했다.
그는 내 맞은편이 아닌 옆 테이블에 앉았다.
그 조심스러움이 좋았다.
그 거리감이 편했다.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방식.
가까운 거리지만,
말을 걸겠다는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어떤 침묵은,
무언보다 더 말을 건다.
“이 찻집 오래됐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30년쯤 됐습니다. 처음엔 제가 지었어요.”
“직접요?”
“예. 한때 설계를 배운 적이 있었거든요.”
“건축하셨어요?”
“조금요. 끝까지 가진 못했습니다. 어울리지 않더라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투에는 후회보다,
담담함이 있었다.
실패라기보다,
그냥 그러기로 한 삶의 어딘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바다는 좋아하세요?”
“네. 싫어하지 않아요. 그냥... 오래 보고 있으면, 편해집니다.”
“저는 예전 바다를 무서워했어요. 뭐랄까, 설명할 수 없는 방향으로 마음을 당기니까요.”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녹차는 식었고,
바깥 바다는 여전히 천천히 물러났다.
파도는 늘 같은 방식으로 돌아오고,
늘 같은 방식으로 떠난다.
하지만 그걸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조금씩 다르다.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요즘 사람들은 왜 다 바다 사진을 찍고 가는지 모르겠어요.”
“잘 나와서요. 아무 데나 대면 구도는 나오니까.”
“그렇죠. 뭘 담고 가려는 건지, 가끔 헷갈립니다.”
그는 테이블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목재는 오래된 체리색.
스크래치가 많았지만,
의외로 안정감 있었다.
“이 테이블, 직접 만드신 건가요?”
“네. 아까 설계를 조금 배웠다고 했지요. 뭐 오래가진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묻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말했다.
“저는 아직 하고 있습니다. 건축을요.”
“좋으세요?”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끝까지 할 이유가 없는 것 같기도 해서요.”
그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아직 괜찮다는 뜻이죠.”
“···그럴까요.”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오히려 위험해요. 그땐 아무것도 안 보이거든요.”
말은 짧았지만,
이상하게 오래 머물렀다.
나는 다시 차를 들었다.
녹차는 미지근했다.
하지만 그 온도가 딱 좋았다.
나는 테이블 모서리를 살짝 만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거친 결이 좋았다.
요즘은 도면보다 이런 가구에 더 마음이 간다.
큰 건물보다 사람 몸에 가까운 구조.
서서히 그런 생각이 늘고 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여기, 다시 고치고 싶어요. 벽체도, 천장도, 물이 많이 들었거든요.”
“제가 도면 그려드릴까요?”
그는 웃었다.
“아직은 괜찮아요. 지금은 이대로도 나쁘지 않아요.”
"...."
잠시 후,
차를 다 마시고 일어나며,
나는 말을 건넸다.
“이 의자랑 테이블, 정말 잘 어울리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뭐랄까··· 이 길을 잘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찻값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그는 손을 들었다.
“다음에 또 오면 그때 주세요.”
“그럴까요.”
“기억 못 하더라도요.”
“괜찮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억 잘 못하는 편이라.”
가게를 나와 바다 쪽으로 몇 발자국 걸었다.
해가 기운다.
작은 등대가 해 질 녘에 잠깐 불을 켜고 있었다.
그 자리에 서서 나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물결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지나갔다는 사실만이 있었다.
가게 입구를 한 번 돌아봤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과 바다가 겹쳐 보였다.
걸음을 떼며 생각했다.
오늘처럼 조용한 하루를 설계할 수 있다면,
그것도 건축의 한 종류일지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