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기차는 오래된 시간을 지나간다》
강원도 어귀의 작은 역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무언가 초성만 남은 낡은 간판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본래는 바로 다음 역까지 가야 했지만, 창밖 풍경이 너무 낯익어서 그만 내리고 말았다.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럴듯한 이유 없이 내려진 것 치고는 꽤 자연스러웠다.
역사 건물은 낮고 오래됐고, 주변은 과하게 조용했다.
겨울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서울의 것과는 달리, 단단하고 얇았다.
나는 그곳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10년 전쯤, 아내와 함께 걷던 어떤 역의 풍경이 겹쳐졌다.
그 역이 여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단의 각도나 벤치의 위치, 낡은 화장실 간판 같은 것들이 이상하게 맞아떨어졌다.
잊고 있던 기억은 대개, 이런 식으로 고개를 든다.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대합실은 작고 따뜻했다. 오래된 기름난로 하나가 가동 중이었다.
바닥은 닳아 있었고, 스티로폼 컵에 반쯤 남은 녹차가 창가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있었다.
그녀는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닦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닦아야 하니까 닦는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문을 열자, 그녀는 짧게 고개를 들었다.
“기차 놓치셨어요?”
“아니요. 일부러 내렸어요.”
“이 역은 거의 안 서는데요.”
“그래서 내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그녀는 유리창 닦기를 멈추고 난로 옆에 앉았다.
“여기서 일하세요?”
“자원봉사 같은 거예요. 대합실 정리하고, 기차 오면 탑승 도와드리고.
실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기다리는 사람이요?”
“네. 오랫동안 기다리는 중이에요.”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어떤 문장은 그냥 거기까지가 좋다.
어설프게 이어 붙이면 이상하게 싸한 느낌만 남게 된다.
나는 대합실을 둘러봤다.
천장의 나무틀, 불규칙하게 떨어진 조명, 벽에 붙은 오래된 벽시계.
분명히 이 역에 온 적은 없을 텐데, 이상하게 모든 게 낯설지 않았다.
“이 벤치, 오래된 거죠?”
내가 손으로 등받이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렇죠. 철도청 시절부터 있던 거라고 하네요. 못도 손으로 박았대요.”
“의자가 나무처럼 나이 드는 걸 보긴 처음입니다.”
“기차보다 오래된 물건이에요, 여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큰 건물보다 이런 의자에 마음이 더 간다.
무언가를 완전히 짓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을 오래 보존해 주는 작업.
그게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말을 꺼냈다.
“예전엔 도시에서 살았어요.
건물도 많고, 사람도 많고··· 나중엔 그냥, 무서워졌어요.
매일 누가 나를 지켜보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래서 여기로 내려왔어요.
여긴··· 아무도 묻지 않거든요.”
그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닦던 유리창을 바라봤다.
거기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고, 그 사이로 멀리 산등성이가 흐릿하게 보였다.
기차 도착 알림이 없었다.
플랫폼 시계는 멈춘 듯했고, 벽시계는 어딘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은 정확하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엔, 기차가 늦어요.”
그녀가 말했다.
“기차가 늦는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왜요?”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나는 그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기다릴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어떤 풍경을 만든다.
도시에서는 거의 잊고 지낸 개념이다.
주머니에서 작은 스케치북을 꺼냈다.
난로, 유리창, 벤치, 천장, 그 아래 앉은 사람.
선 몇 개로 간단히 구조를 그렸다.
“화가세요?"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아뇨"
"음"
“예전에는 건축을 하는 척하며 살았죠.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는 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녀는 웃지 않았지만, 말투엔 미묘한 온기가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기차가 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떠날 준비를 했다.
그녀가 탑승을 도와주는 걸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의자가 오래된 역보다 더 오래 버틴다는 말, 인상 깊었어요.”
“마음에 남았으면 다행이네요.”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지도, 이름을 묻지도 않았다.
나는 그대로, 조용히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는 서서히 멈췄고, 나는 문 앞에 섰다.
문이 열리기 전, 다시 대합실을 돌아봤다.
그녀는 유리창을 다시 닦고 있었다.
그게 삶의 방식인 사람처럼.
기차에 올라 창밖을 보자, 그녀가 닦은 창문 사이로 빛이 번졌다.
나는 생각했다.
기차는 시간을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오래된 무언가를 한 칸씩 지나가는 거라고.
그날의 역은 지도에도, 기억에도 잘 남지 않았지만
내 안에 조용히 흔들리는, 하나의 장소로 머물렀다.